기억은 과거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사건은 지나갔지만,
기억은 늘 현재의 얼굴로 돌아왔다.
그래서 그녀는
지금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자주 다른 시간에 반응했다.
아무 일도 없는 순간에
마음이 먼저 긴장했고,
특별할 것 없는 말에
감정이 먼저 흔들렸다.
그때마다 그녀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왜 지금 이런 생각이 드는지,
왜 이 장면이 이렇게 크게 느껴지는지.
하지만 그 반응은
지금의 상황 때문이 아니라
이미 겪어본 감각이
먼저 움직인 결과일 때가 많았다.
기억은
과거의 장면을 그대로 꺼내오지 않았다.
지금의 상황에 맞게
모양을 바꿔 다시 나타났다.
그래서 지금의 침묵은
예전의 이별이 되었고,
지금의 거리감은
이미 경험한 상실처럼 느껴졌다.
같은 일이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같은 감각이 반복되는 것이었다.
기억은
시간의 순서를 따르지 않았다.
의미와 온도를 따라 움직였다.
비슷한 공기,
비슷한 말투,
비슷한 침묵이 스치는 순간
기억은
지금이라는 자리에 섞여 들어왔다.
그래서 그녀는
현재에 있으면서도
이미 지나간 시간을
다시 통과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시간은
동그랗게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아무 일도 없던 날을
나중에 가장 또렷하게 기억했다.
웃고 있었고,
평범했고,
아무 문제도 없어 보였는데
마음만은
이유 없이
먼저 무너졌던 날을.
문제는
그 기억이 틀렸기 때문이 아니었다.
기억은 늘 정직했다.
다만
지금과 과거를 구분하지 않을 뿐이었다.
기억에게는
“이미 끝난 일”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다시 아플 수 있는 감각이라면
언제든 현재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그녀는
지금의 사람에게
과거의 반응을 건넸다.
아직 떠나지 않은 사람 앞에서
이미 떠날 것 같은 마음을 느꼈고,
아직 말하지 않은 침묵에서
이미 겪어본 결말을 보았다.
그 순간,
현재는 흐려졌다.
지금의 장면은 뒤로 밀리고
기억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래서 관계는
현재에서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했다.
지금의 대화가 아니라
지나간 장면과 마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종종 말한다.
기억을 잊어야 한다고,
지워야 한다고.
하지만 그녀는
기억이 지워질수록
더 또렷해진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해되지 않은 기억은
끝나지 않은 질문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기억이 현재형으로 돌아오는 이유는
아직 그 기억이
제자리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제자리는
미화도 아니고,
용서도 아니다.
그저
그 일이 과거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기억은
이해되면 물러났고,
의미를 찾으면
조용해졌다.
그래서 기억을 마주한다는 건
과거로 돌아가는 일이 아니라
현재를 회복하는 일에 가까웠다.
기억이 다시 떠오를 때는
아직 정리되지 않은
현재의 감각이 남아 있다는 뜻이었다.
“이건 지금이 아니야.”
“이건 이미 지나간 시간이야.”
그 말을
머리가 아니라
몸이 이해하는 순간,
기억은
비로소 과거형이 되었다.
기억은 늘
현재의 얼굴로 돌아왔지만,
현재에 머물 필요는 없었다.
그 차이를 알게 될 때,
그녀는
조금 더 오래
지금에 머물 수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녀는
기억을 해석하지도,
밀어내지도 않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