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토버스카이(1999), 현물의 삶과 선물의 삶

당신은 어느 시간을 살고 있는가

by 슴도치

내가 좋아하는 노래 중에 베리 매닐로우가 부른 ‘When October goes’(1996)라는 노래가 있다.

가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And when October goes 그리고 10월이 지나갈 때

The snow begins to fly 눈이 내리기 시작해

Above the smokey roofs 연기가 덮인 지붕 위로

I watch the planes go by 나는 비행기들이 지나가는 걸 바라봐.



10월은 하늘을 올려다보기 좋은 계절이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그 계절의 온도는 끝나감을 아쉬워하거나 새로 시작할 순간을 미리 기대하기에 알맞은 시간이다. 1957년 10월 소련의 스푸트니크 위성이 미국의 밤하늘을 가로지를 때 두려움을 느낀 사람도, 그 작은 빛에서 희망을 본 사람도 있다. 호머 히컴(제이크 질렌할)은 후자였다. 그는 스푸트니크를 보며 망해가는 마을과 탄광의 삶이 아니라 광활한 우주를 떠올렸다. 바로, 저 넓은 세상과 가능성에 대해서.



아버지인 존 히컴(크리스 쿠퍼)의 삶은 땅속에 있다. 그의 세계는 보이고, 만져지고, 숨 쉴 수 있는 세계다. 석탄의 무게, 동료의 새카만 얼굴, 무너지는 갱도를 막는 지지대, 즉각적인 효용. 즉 현재라는 시간만을 혹독하게 바라보는 인간이다. 그러므로 그는 보이지 않는 곳을 향해 애쓰는 호머의 시간을 이해할 수 없다. 존은 오늘도 누군가를 살리고, 마을을 지켜야 한다. 그 삶은 단단하고, 남성적이고, 뚜렷한 책임의 형태를 갖는다. 그러나 그 땅은 경계가 분명하다. 깊이는 있으나, 위로 갈 수는 없다. 호머와 존의 갈등은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삶의 방향성에 차이. 존이 삶을 대하는 방식은 숭고하지만 닫혀있다. 그리고 삶에 대한 개폐의 방식은 그 둘이 대하는 삶의 태도와도 연관된다.



반대로 호머가 바라보는 삶은 우주에 있다. 그 삶은 만져지지도 명확하게 볼 수도 없는 삶이다. 미지의 영역. 이미 존재하는 것을 만지는 존과 달리, 호머의 삶은 쏘기 전까지 실체를 알 수가 없다. 실패할 가능성이 훨씬 크며, 당장은 아무 성과도 없고, 사람을 살리는 일도 아니다. 로켓은 발사되기 전까지는 그저 원형 통일뿐이다. 아무 쓸모가 없다. 호머의 꿈은 현실이 되기 전까지 무책임해 보이고 어린아이 장난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삶은 경계가 없고 방향이 열려 있으며 실패조차 다시 시작할 이유가 된다. 그리고 한 번 성공하면 마을이 아니라 세상을 바꾼다. 호머의 삶은 존의 삶보다 연약해 보이지만 사실 사방으로 열려 있다. 존재의 증명은 늦지만, 그 가능성은 무한하다.



존은 현물現物의 인생이고, 호머는 선물先物의 인생이다. 이 영화가 잔인하게 아름다운 이유는 아버지와 아들이 둘 다 틀리지 않았다는 데 있다. 그 둘이 삶을 견지하는 태도는 동일하다. 다만, 시간과 공간을 바라보는 시각만 달랐을 뿐. 존 히컴이 없었다면 현재의 사람들이 더 많이 다치고 죽었을 것이고, 호머 히컴이 없었다면 미래의 세상은 조금도 넓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 영화는 두 삶 중에 어떤 삶이 더 낫다고 말하는 영화가 아니다. 우주로 가고 싶은 인간의 이상은 위대하지만, 탄광에서 석탄을 캐는 노동의 가치 또한 숭고하다. 석탄 가루를 들이마시며 한 줌 빛의 랜턴을 켜고 지하로 내려가 가정을 지키는 사람들이 숭고하지 않다면 무엇이 숭고하겠는가. 하지만 그 일만이 유일하고 명예롭다고, 다른 꿈을 짓누르고 삶을 정형화시키는 것은 옳지 못하다.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 그 질문에 답하는 것은 온전히 내 몫이다. 아들을 자신의 삶의 방향으로 끌어내리려는 존에게 호머는 말한다. “저는 우주로 가고 싶어요.”



삶에 대한 생각이 달라도 서로의 꿈을 인정하고, 어깨의 손을 올리며 응원할 수 있다. 존의 방식이 호머의 방식과 정반대였다고 하더라도, 호머의 영웅이 영원히 존이었던 것처럼. 선명하게 빛나는 10월의 하늘. 옥토버스카이(1999)였다.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