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야, 31-1

31과 1 사이

by 슴도치



남자는 31일에 태어났다. 그달에는 더 태어난 사람이 없었다. 감기가 단단히 걸린 그는 연신 재채기를 해댔다. 눈앞에 별이 번쩍번쩍하고 녹은 달이 코로 나왔다. 감기는 다 나아도 새로 걸렸다. 남자는 오늘이 몇일인가 떠올려보려고 했지만 수요일이라는 사실만 기억이 났다. 시작도 끝도 아닌 평일의 중간 날. 최근 몇 년 간 남자는 두꺼운 이불을 덮은 사람처럼 지냈다. 밤에는 방 한가운데 흰 무덤처럼 보였다. 좋은 날이 오겠지. 남자의 돌아가신 할머니는 곧잘 그런 말도 했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날도 남자의 생일이었다. 그는 슬펐지만 눈물이 많이 났던 건 아니었다. 다만, 생일 때마다 또 새로 슬펐다. 어제 타온 약봉지에는 ‘빠른 쾌유를 빕니다’라고 쓰여있었다. 그는 그믐달 같은 알약을 삼켰다. 12시가 다 되어가는데 밖은 여전히 시끌벅적하였다. 남자는 그달의 마지막 날에 태어났다. 다음날은 늘 1일이었다. TV에서 사람들이 막 종을 치려 하고 있었다. 바깥에서 숫자를 세는 소리가 들렸다. 별안간 벌떡 일어난 남자도 숫자를 거꾸로 세기 시작했다. 남자의 몸에서 흰 이불이 흙처럼 후드득 떨어졌다.








12월 31일은 생각할 것들이 많아지는 날이다. 이미 지나간 364일의 날들이 바로 조금 전처럼 느껴지지만 벌써 한 해가 지났다. 연초에 다짐했던 일과 바랐던 일들에 대해 다시 떠올려보게 된다. 그 모든 일이 이루어졌나, 혹은 내년으로 미뤄야 하나, 그것도 아니라면 포기해야 하나. 관계도 마찬가지다. 좋았던 인연이 나빠질 수도, 나빴던 인연이 사라질 수도, 없었던 인연이 새로 생겼을 수도 있다. 그 모든 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변하는 이치다. 마치 계절이 지나고 연도가 바뀌듯. 시간과 인연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기도, 부질없다고 잊어버리기도 하는 날. 31일은 지나간 시간과 다가올 시간의 교차점이다.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면 비로소 한 해가 지나간 것을 실감한다. 그곳에 모인 수많은 인파들 또한 다사다난했던 한 해와 희망찬 미래를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나간 시간과 완벽하게 작별하는 사람도, 닥쳐올 미래를 완전하게 이해하는 사람도 없다. 12월 31일은 지나간 364일에 대한 추모식과 다가올 365일에 대한 예행식 같은 날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31일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 마치 축구시합의 역전골이나 한강의 불꽃놀이처럼. 지나간 모든 날들에 대한 보상이나 다가올 시간에 대한 기약 없는 기대심 같은 감정 말이다. 어쩌면 거리의 인파들은 그 감정을 식히러 나온 사람들이 아닐까. 제야의 종 앞에 모인 사람들은 거꾸로 숫자를 센다. 10에서 0으로, 많음에서 적음으로. 사람들이 그 0의 순간에 껴안고 소리치고 좋아하는 이유는 후회스러웠던 지난 한 해가 삭제되는 듯한 착각 속의 기쁨일 수도 있다.



31 숫자 뒤에 1이 오는 경우는 별로 없다. 저물어가는 때에도 새롭게 시작하는 것들은 항상 있다. 인생을 이해할 수 없으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건 그러한 변수 덕분이다. 끝과 시작은 닿아있다. 10에서 0으로 끝난 숫자가 1로 다시 시작되는 것처럼. 주저앉고 다시 나아가고 선택은 각자의 것이지만, 우리 모두에게 동일한 시간이 흐른다. 벌써 12월 31일이다. 새로운 1일의 바로 전날이다.


Happy ne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