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이 끓는다는 것에 대하여
물이 끓기 시작했다. 아이는 학사모를 쓰고 있었다. 뒤에 앉은 친구가 자꾸 장난을 걸었다. 아이는 뒤를 돌아보고 마주 웃었다. 아이는 라면을 좋아했다. 혼자 있을 때 라면을 끓일 줄 아는 나이였다. 옆에 앉은 남자애가 큰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객석에 앉은 어른들이 웃었다. 축사를 하던 학부모회 어머니는 아무도 울지 않는데 혼자 울었다. 이번에는 아이들이 고개를 돌리고 웃었다. 마지막 교가를 부르고 아이는 친구들과 사진을 찍었다. 아이와 어른이 학사모를 번갈아 쓰며 웃었다. 밥 먹을 때가 되어서 엄마는 아이에게 갈 데가 있다고 하였다. 아이는 엄마가 가는 곳을 따라가 본 적이 없었다. 아이는 엄마와 아빠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사진 속에 셋도 웃었다. 단란한 가족처럼. 라면을 끓일 시간만큼이었다. 아이가 엄마에게 손을 흔들 때, 아빠는 말없이 저쪽에서 기다렸다. 아이는 뚜껑을 덮었다.
물이 끓는다는 것은 안정에서 불안정으로의 이행이다. 100도에서 액체는 증발하려고 한다. 형태를 잃으려고 한다. 기체가 된 물은 여전히 물이지만,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어쩌면 임계점을 넘어간 관계의 모습일 수도 있다. 여전히 사랑하지만, 눈에는 보이지 않는 관계. 그것을 막으려면 뚜껑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모두 증발해 버리고 까맣게 탄 냄비 바닥만 남을 것이다.
뜨겁게 달궈진 관계는 말과 행동을 아무렇게나 내뱉게 만든다. 결국 표면이 난폭해지고 그 안에 든 것은 냄비 밖으로 넘치고 만다. 되돌릴 수 없는 상태도 분명 존재한다. 이미 없어진 것들은 채울 수가 없다. 만약 채워진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 전의 분자와는 다른 것이다. 우리는 종종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후회하거나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혼란스러워한다. 이별에는 모두 다른 종류의 방법이 있지만 결국에는 무언가 있었던 흔적만 남는다.
뚜껑을 덮으면 물이 끓는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 변화가 없다는 건 아니다. 뚜껑을 아무리 세게 닫아도 틈 사이에서 덜그럭거리며 빠져나오는 것들이 있다. 오히려 압력과 온도는 높아지고 물이 밀려 새어 나오기도 한다. 그렇게 되면 기화되는 것을 막으려고 했던 양보다 더 많은 양이 사라지는 모양이 된다. 사라지기로 작정한 것들은 도무지 막을 방법이 없다. 끓기 시작한 관계를 처음처럼 되돌릴 방법은 없다. 끝까지 가서 마지막 한 방울까지 없어지든, 이미 놓친 것들을 인정하며 살든 정답도 없다. 그러나 증기는 어디선가 다시 액화된다. 눈앞에 당장 사라진 것만 보자면 아쉽지만, 그만큼 어디선가 다시 고여들 여지도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