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변변찮은 밤이
말이 없어진 우리는 춘천에 도착을 했다. 소금 같은 눈발이 날렸다. 세상이 하얗게 염장鹽藏 되어갔다. 너무 늦어서 닭갈비 집에 손님이 없었다. 할 말이 없는 나는 찬 소주만 마셨다. 입 안에서 눈이 녹았다. 창에 비친 당신은 왼손으로 젓가락질을 참 잘한다. 그쪽 세계에는 눈이 내리지 않았다. 우리는 너무 웃었다. 닭은 새처럼 날았다. 내 왼손으로 당신의 얼굴선을 길처럼 걸었다. 그 길은 빙판도 없이 다 마른 길이었다. 그러나 나는 아무 색도 없이 창에 비쳐있었다.
당신이 오른손으로 소주를 따랐다. 나는 이쪽 세계의 얼굴선을 보았다. 그 길도 한적해서 나 혼자 다니기 좋을 것 같았다. 보관될 것이 많은 세상이었다. 수북이 쌓인 소금이 길에 가득이었다. 먹은 것도 없이 입이 짰다. 당신이 오른손으로 내 얼굴을 만졌다. 그 윤곽을 따라 나도 색깔이 생겼다. 아무 말 없는 길가에서 많은 말을 했다. 그 말도 눈처럼 내리다가 녹고 녹다가 쌓였다. 우리는 서로를 불쌍히 여겼다. 끌어안고 동사凍死하는 사람들처럼. 어느덧 사장이 문을 열고 청소를 했다. 열린 문으로 눈발이 들어왔고 우리도 하얗게하얗게 되어갔다.
소금은 부패를 막는다. 미생물 증식을 억제하고 장기간 보관을 가능하게 만든다. 그 말은 마지막 시간을 멈춘다는 말이다. 염장된 것은 물기가 빠져나가고 단단해지고 오래간다. 잃고 싶지 않은 것을 남기는 방법.
사람도 기억을 염장한다. 시간이 지나도 잊지 못하는 것들. 남기고 싶은 것들. 우리는 잊은 척 자신을 속이지만 아무것도 잊지 못한다. 마치 ‘보지 마’라고 말하면 보게 되는 것처럼, 그것은 짠 내를 풍기며 그곳에 남아있다. 서랍 깊은 곳, 방치된 상자 속, 오래된 다락방 같은 곳에 보관된 기억들.
겨울도 멈춤의 계절이다. 눈은 하얗게 세상을 보존한다. 더럽고 추한 것도 이불을 덮듯 감춘다. 눈 내린 다음 날 세상은 새것 같다. 하지만 눈이 녹으면 드러나는 것들은 새삼 민망하다. 소금과 눈은 닮았다. 하얗게 시간을 멈추지만 쉽게 녹아 없어진다. 소금은 스며들고 눈은 덮어둔다. 기억도 마찬가지다. 잊은 듯 억지로 잡아둔 것들이 순간 떠오를 때는 문득 아프기도 하다.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흘려보낼 것인가. 그것은 시간 앞에서 늘 지독한 난제로 남는다.
어떤 밤과 기억은 염장하고 싶다. 그리 즐겁지도 행복하지도 않은 기억이지만 잊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유일한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춘천의 늦은 밤, 내리던 눈발, 닭갈비와 소주잔, 식기 부딪히는 소리, 틀어둔 TV의 대설 경보, 나도 모르게 소금에 절인 오래된 기억. 공기의 밀도까지 선명하게 보존된 기억.
그러나 아무리 염장이 잘되어도 실제의 기억과는 다를 것이다. 아무리 부패를 멈춰두어도 조금씩 상하는 건 어쩔 수 없으니까. 그 기억은 최대한 보존되겠지만, 영원한 것은 아니다. 눈은 봄이 오면 사라진다. 그리고 그 자리에 다른 것이 자란다. 염장은 보존하고 눈은 순환한다. 어쩌면 기억이라는 영역에서 소금보다 눈이 더 건강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흘려보내고 다시 채우고.
그런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기억에 소금을 살살 뿌린다. 잃고 싶지 않아서, 이 순간이 영원하길 바라면서. 하지만 기억 속 그 사람은 이제 여기 없다. 내가 바라보고 만지고 냄새 맡는 것은 과거의 그 사람이다. 기억이 실제와 다른 것의 흥미로운 부분은 여기에 있다. 현실보다 기억 속에서 더욱 아름답게 남는 사람도 있다는 것. 결국 잊게 되고 유한하다는 걸 알기에 오래 남는다는 것. 우리의 변변찮은 밤이 이토록 하얗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