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속된 비밀

진실의 속도

by 슴도치

몇 년 만에 듣는 목소리였다. 수화기 너머, 오래된 전화번호처럼 아득한 목소리였다. 도착은 멀었지만 기차는 속도를 줄였다. 옆자리에 앉은 남자는 은행원이었다. 동료로 보이는 사람과 고객의 인증서에 관해 떠들었다. 혼자만 알고 있는 암호들. 수화기 너머 목소리도 잃어버린 비밀번호를 닮았다. 몇 번씩 틀려 잠겨버린 계좌. 출금되지 않는 목소리처럼 남자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내일부터 긴 연휴였다. 고향에 도착한 그들도 공유된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에 들어갈 것이었다. 남자는 시계를 보았다. 기차는 큰 산을 빙 돌아 달렸다. 속도가 줄어든 이유를 이제야 알아챘다. 은행원이 서류 가방을 요란스럽게 닫았다. 4자리 숫자를 돌려야 열 수 있는 가방이었다. 남자는 수화기가 아니라 그 숫자에 대고 말하기 시작했다.






다이너마이트를 만든 노벨은 애초부터 그것을 군사용으로 만들지 않았다. 오히려 더 안전한 폭약으로 건설과 토목에 기여하려고 했다. 어느 날, 오보된 자신의 부고문에 ‘죽음의 상인’이라는 별칭에 충격을 받고 노벨상을 만든 것은 유명한 일화다.



진실의 속도에만 집착하는 것은 섣부르다. 그 진실도 다이너마이트 같아서 사람과 장소, 시간을 잘 맞춰 터뜨려야 한다. 마치 터널을 뚫거나 오래된 건물을 부술 때처럼. 거리나 집 안에 놓인 폭탄은 아무도 도울 수 없다. 거짓을 말한다고 악인이 아니고, 진실만 떠든다고 선인이 아니다. 모든 것에는 양면이 있다.


누군가를 위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어느 쪽이든 의도는 결과를 대체할 수 없다. 따지고 보면 자기 자신을 위한 일도 실패로 끝나는 일이 허다하다. 그러므로 헌신과 도움이 오로지 타인을 위해서였다는 주장은 자칫 오만하게 들린다. 그 위함조차 어쩌면 한순간 마음의 안위를 위해서였을지도 모르니까.


그럼에도 진실의 효용을 비하할 수는 없다. 어쨌든 아무리 잘 만든 거짓도 가장 초라한 진실을 이길 수 없다. 터널을 뚫지 못해 산을 빙 둘러가는 기차처럼, 감속된 진실도 언젠가 목적지에 닿는다. 어쩌면 감속은 후퇴가 아니라 또 다른 방식의 통과일지도 모른다. 비밀번호를 말하듯 아무 감정 없이 말을 해도 진실은 진실이다. 군사용이든, 평화용이든 노벨의 다이너마이트가 다이너마이트인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