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근잘근잘근 - 그

나의 진심과 상대의 허락

by 슴도치

남자는 여자가 벽 같았다. 여자는 오래도록 창문 쪽만 바라봤다. 남자는 최대한 침착하게 말을 이어갔다. 남자는 어렸을 적에 장난감 블록을 좋아했다. 객차를 높게 쌓으면 벽이 되었다. 여자는 벽으로 만든 기차 같았다. 남자는 이제 막 출발하는 기차를 쫓아가는 사람처럼 언성이 높아졌다. 한달음으로 달려도 기차는 속도가 빨랐다. 흥분을 한 남자가 식탁을 내려치다가 식기가 모두 깨졌을 때도 남자는 혼자 달리고 있었다. 여자는 깨진 식기를 한 번 힐끗 보더니, 스르르 닫히는 객차의 문처럼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닫힌 문은 벽이 되었고 기차는 매섭게 멀어졌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남자는 일어나 여자의 어깨를 잡았다. 덜컹거리는 진동을 온몸으로 막아선 남자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탈선한 여자가 바닥을 뒹굴었고 남자는 황급히 여자를 끌어안았다. 그녀를 자신의 선로에 올려놓으려고 했다. 서로의 숨소리. 놀랄 만큼 고요해진 순간, 여자가 남자의 귀를 콱 깨물어 버렸다.







관계는 헌신적이면서 이기적이다. 그것은 선하면서 악하다. 사랑이고 부를 수도 있겠다. 삶이면서 죽음. 우리의 행위에는 늘 이중성이 섞여 있다. 의도와 결과가 꼭 하나일 수 없다. 살다 보면 애초의 뜻과 다른 결과가 나타나기 마련이다.



이 길과 저 길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악의는 없다. 어느 길로 가든 선택은 당신의 몫이다. 하지만 사랑 앞에서는 아니다. 언쟁을 벌이고 드잡이를 하더라도 내가 원하는 길로 갔으면 좋겠다. 그게 맞는 길이라서가 아니라 내가 선택한 길이라서. 두 사람의 선택이 같을 수 없지만 같기를 바라는 마음은 늘 혼재한다. 당신의 선택을 존중하면서도 내 선택을 따라오길 바라는 마음. 그 마음은 곧잘 폭력적이 된다.


타자화시킬 수 없다면 사랑하는 중이다. 당신의 행복과 기쁨을 원하고 괴로움과 슬픔을 멀리했으면 하는 것이 내 욕망이다. 당신 또한 내 선택의 과정과 결과를 욕망했으면 하는 것이다. 하지만 각자의 기준이 같을 수 없다. 나의 행복과 슬픔이 당신에게 똑같이 적용되리라는 희망은 희망일 뿐이다. 우리는 언제나 상대를 자유롭게 해 주길 바라지만 새장의 문은 꼭 잠가놓는다. 상대의 예상된 실패를 안쓰러워하면서도 ‘그럴 줄 알았어’ 라며 은근히 우쭐하기도, 더 강하게 밀어붙일 걸 후회하기도 한다. 내가 원하는 건 어쩌면 당신의 기준이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결국 상대의 의사에 맡겨야 한다. 받아들일 용의가 있는 이에게 나의 선의도, 행복도 전해지는 법이다.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잔소리고 소음이다. 괜히 고집을 부리다간 귀를 콱 깨물릴 수도 있다. 하긴, 그런 실수를 한 번 정도는 해보라고 귀가 두 개일 수도 있겠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