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을 먹는 소녀

그러나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by 슴도치

소녀는 거침없이 성냥에 불을 붙였다. 지력이 다한 비탈밭에 불을 놓는다고 어른들이 혀를 차며 지나갔다. 그러나 소녀에게는 이동할 비탈이 더는 없었다. 며칠 째 감자 구경도 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산을 넘어간 지 사나흘이 지났는데 돌아오지 않았다. 호랑이한테 물려갔다고. 말하기 좋아하는 아낙들이 개울가에서 떠들었다. 소녀는 성냥에 또 불을 놓았다. 시든 작물은 허기졌던 것처럼. 작은 불길에도 잘만 탔다. 불을 먹어야 자라는 것들을 보며 소녀는 군침을 삼켰다. 불이 장막처럼 소녀 주위를 빙 둘러갔다. 그것은 아버지 따라 시내에 내려갔을 때 보았던 기와집에 높은 담처럼 보였다. 그 담 너머에는 감자도 있고 쌀도 있고 옥수수도 있을 거였다. 밭이 검게 변할수록 소녀의 가슴도 불처럼 너울거렸다. 다시 시작하자. 아가야. 산을 넘기 전 아버지는 소녀의 손을 꼭 잡고 말했었다. 불이 거세게 타오르기 전에 입가에 검댕이를 묻힌 소녀가 춤추는 것을 본 것 같다고. 지게를 진 심마니가 헐떡이며 마을이장에게 말했을 때는. 이미 온 산이 한 몸처럼 활활 타고 있는 중이었다.








불을 놓아 재를 만들어야 사는 것들이 있고, 불을 놓아 재가 되어 사라지는 것들도 있다. 관계는 때로 불길을 닮았다. 처음엔 따뜻하고 은은하지만, 어딘가에서 불쏘시개가 붙고 나면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른다. 그런데 그러고 난 뒤에는? 계속해서 뜨겁게 타오르는 관계란 없다. 언제나 냉각기라는 게 존재한다. 그리고 다 타버린 뒤에 우리는 결정을 하게 되는 것이다. 다 타버리고 재만 남은 밭에 씨를 뿌릴지, 서로 헤어지고 또 다른 비탈길을 향해 나아갈지.



GO? STOP? 혹은 묻고 더블로 가?


말 한마디, 표정 하나가 장작이 되고, 오래 쌓인 침묵은 기름이 된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태운다. 어느 날엔 정말, 전부 다 타버렸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이 밭은 끝이로구나' 했을 때. 새까맣게 탄 밭에 망연자실한다면 이별의 수순인 것이고, 돋아난 작은 새싹 하나를 발견하게 되는 것은 아직 인연이 끝나지 않게끔 작동되는 것이리라. 오래된 관계란 한 주기의 반복이다. 갑작스러운 허기처럼 허겁지겁 상대를 찾을 적도 있고, 이상한 포만감에 쳐다도 보기 싫을 때도 있다. 그것은 인간의 본연스러운 감정이다. 날씨가 변하는 것처럼 사람의 마음도 변한다. 중요한 것은 그 자리에 끝까지 남아있는 가이다. 그 곁에 작은 불씨만 한 온기로라도 남아있었는가. 그 온도의 여부다.




결국 사랑도 생존의 문제인 것이다.


연인이란 상대에게 많은 역할을 제공한다. 사랑하는 사람, 친구, 선생님, 부모, 상담사 등 우리는 많은 부분을 연인에게서 얻는다. 미래를 약속하고 떠난 사람이 돌아오지 않고 내가 그 자리에 홀로 남는다면 나는 길 잃은 어린아이처럼 되어버린다. 결국 사랑도 생존의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이동할 비탈길도 없고, 나아갈 힘도 없는 사람은 걷잡을 수 없는 불길에 몸도 마음도 새까맣게 타버린다. 마음에는 입이 있고 일단 지펴지기 시작한 마음에는 끝없이 무언가를 넣어줘야 한다. 마치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 나오는 불꽃의 악마 캘시퍼처럼. 달걀껍데기이라도 넣어줘야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쓸모없는 것이 없다.



어른들은 늘, 불태운 밭이 잘 자란다고 했다. 불이 지나간 자리에서 싹이 튼다고 했다. 타버린 말, 타버린 오해, 타버린 마음의 가장자리에서 비로소 무언가가 자라기 시작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말을 꺼내고, 다시 손을 뻗는다. 혹시 몰라서, 이 관계가 끝난 게 아니라 더 깊어질 기회일지도 몰라서. 모든 불이 파괴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불은 생명을 뜻하기도 한다. 누군가는 지금, 그 재 위에 감자를 심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수확하다 보면 넓은 기와집은 아닐지라도 둘이 함께 살 작은 집 한 채 정도는 지었으면 하는 것이다. 산을 넘어 아버지가 돌아왔을까? 나는 그렇다고 믿고 싶다. 그리고 소녀가 잘 자라주었으면 싶다. 둘이 비탈길이 아니라 넓은 들로 나아가는 삶을 살았으면 싶다. 재는 뜨겁고 쓸모없어 보이지만, 그 안에는 비옥함도 함께 섞여 있다. 관계에서도 그렇다. 쓸모없는 것이 없다.



인간다움이란 일정한 온도다.

새까만 재에서 다시 나아가든지, 재로 끝나게 되든지. 그것은 불을 열심히 지르고 있는 당신들의 몫이다. 오늘도 어딘가에서 누군가의 지력이 다한 밭이 활활 타고 있을 것이다. 살아가려고 안간힘을 다하는 그 불빛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관계의 단면이다. 인간다움이란 일정한 온도다. 너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온도. 그 온도를 찾아가는 여정이 너무 길고 고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당신과는 언제나 GO



ChatGPT Image 2025년 6월 1일 오전 10_34_06.png



※ 현행법 상 화전은 불법입니다. 시적 장치를 위해 묘사한 것이지 산에 불을 지르면 안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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