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고 돌아옴으로 한 뼘 더 나아가는 인간
남자는 이제 기다리는 것에 진력이 났다. 그는 회중시계를 주머니에서 꺼냈다. 약속 시간이 한참 지나있었다. 멀리 기차의 기적소리가 들렸다. 마지막 기차였다. 사람들이 승강장으로 모여들었다. 손마다 짐가방이 한가득이었다. 아이를 목마 태우고 양손에 짐가방을 든 사람도 있었다. 손바닥을 맞대고 방방 뛰는 소녀들. 점잖게 차려입은 노부부가 눈시울 붉혔다. 그들은 마침내 이곳을 떠날 수 있음을 실감했다. 몇 시간 후 공습이 시작되면 이 도시에는 콘크리트 조각과 위선자들만 남을 것이었다. 곧이어 기차가 도착한다는 안내 방송이 들렸다. 이제 사람들의 기대는 환호성으로 바뀌어 있었다. 기적이야! 어떤 사람이 호들갑을 떨었다.
남자는 초조함이 너울처럼 밀려드는 걸 느꼈다. 이 사람들 사이에서 그 혼자만 낯선 외국인 같았다. 그는 다시 한번 회중시계를 꺼냈다. 시작한다는 건 떠난다는 의미와 같았다. 남으면서 시작하는 사람은 없었다. 남자는 몹시도 떠나고 싶었다. 그때 저편에서 남자의 이름을 부르는 여자가 뛰어오고 있었다. 한 손으로 모자를 부여잡고 자기 몸 만 한 짐가방을 끌고 오는 여자가 기도문의 첫 구절에 등장하는 신의 이름처럼. 그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남자는 다른 쪽 주머니에서 두 장의 기차표를 꺼내 마주 흔들었다. 그들은 시작을 보고 있었다. 가까운 곳에서 아니 바로 앞에서 들리는 것처럼. 크게 기적소리가 들렸다.
나는 언제나 승강장이 좋았다. 기차역이나 공항에서 떠나고 돌아오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기 좋아했다. 나른함과 설렘이 교차하는 공간에서 나는 아무 데도 떠나지 않고 그들을 관찰했다. 그들은 모두 자유인이었다. 그 도착과 출발은 온전한 자발적인 선택들이었고 나는 자신의 권리를 실행하는 각각의 존재들이 새삼 존엄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들의 자유를 마음대로 위탁받은 사람처럼 만남과 이별을 대리만족했다. 모든 것에는 시작과 끝이 있었고 여행자들의 얼굴도 그랬다. 그 표정들은 하나의 지도 같았다. 나는 그 지도를 보며 가보지도 않은 국경선과 산소가 희박한 산등성이와 이국적인 빌라의 테라스에 도착했다. 구걸하던 거지와 비열한 소매치기, 기품 있는 귀부인과 마음씨 좋은 하숙 주인을 만났다. 나는 그런 것을 상상해 보는 것이 좋았다. 나는 그 승강장에 앉아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으면서 아무거나 시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무엇도 변하지 않은 채였다. 나는 여전히 겁쟁이였고 어디도 가지 못함으로 누구도 되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었지만 비난받을 일은 아니었다. 나는 나 자신을 학대하는 것을 반대했다. 나는 떠날 수 없음이 안타까울 뿐이지, 한심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내가 언젠가는 떠날 것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아직 기차 시간이, 표가 준비되지 않았을 뿐이지 나는 언제나 떠나고 싶었고 시작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떠나기 위해 태어났다. 그 떠남은 고향이 될 수도, 타향이 될 수도, 낯익은 곳이나 낯선 곳이 될 수도 있다. 이를테면 출근하거나 밥을 먹으러 갈 때도 우리는 작은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 여행길은 매일 같아 보여도 실상 들여다보면 매번 달랐다. 세상에 완벽하게 동일한 하루란 없었다.
우리 모두 여행자다. 크건 작건, 가깝건 멀건, 시작하고 끝나고 떠나고 헤어지고 만나고 도착하며 우리는 배우고 성장하고 이동하고 나로서 또 다른 내가 된다. 나는 그 사실이 삶의 전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인간이란, 정체되어 있지 않고 계속해서 변화하고 나아가는 존재라는 것. 물론, 멀리 가는 사람도 있고, 가까이 가는 사람도 있고, 나쁜 길로 빠지는 사람도 있고 좋은 길로 곧게 나아가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들 모두 인간이기 때문에 끝없이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나는 그 이동이 삶의 정수精髓라고 생각했다.
아직 나는 내가 어디로 가야 할지, 내 기차표는 어디서 사야 할지 잘 모른다. 그러나 그 불확실한 모호함이 나를 출발하게 해 줄 거라는 건 안다. 그리고 그 시작선에 서 있을 때 배웅해 주는 사람도, 함께 떠나는 사람도 있었으면 한다. 나는 지금 그들을 준비하는 중일지도 모르겠다.
나의 여행이 좋은 여행이었으면 좋겠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의 여행도 기가 막히게 좋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우리 모두 돌아왔을 때 떠나기 전의 순수함과 돌아온 후의 깨달음이 공존했으면 좋겠다. 멀리 기적 소리가 들린다. 그 기적 소리는 언제고 내 차례가 올 거라는 기적의 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