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 속의 영원
윗집 할멈이 노망이 난 건 작년이었다. 병에 걸리기 전에는 다정한 사람이었다. 봄마다 쑥떡을 만들어 줬었다. 이거, 이거 가져가라. 할멈은 똑같은 단어를 두 번씩 말했었다. 떡이 올려진 손의 주름주름 틈 사이사이마다 시간이 응축되어 있어서. 나는 떡을 떡을 받아먹는 게 아니라 켜켜이 쌓인 그녀의 시간시간을 엿보는 기분이었다. 파도소리가 들렸다.
이거, 이거 가져가라. 할멈은 떡 만 한 돌멩이를 내게 건넸다. 그 돌멩이도 할멈보다 오래오래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돌멩이에는 주름주름이 없었다. 돌멩이도 사실 노망이 들린 채가 아닐까. 꼬마꼬마들이 공터에서 공을 차며 놀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작은 작은 아이가 힘껏 찬 공이 할멈의 발치에 와닿았다. 파도와 파도가 만났다.
할멈은 쑥떡과 돌멩이를 건네던 손으로 공을 주워 들었다. 과거로 돌아간 할멈이 소녀처럼 웃었다. 더욱 주름진 그 감당치 못할 시간의 파랑이 나를 덮쳤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온몸으로 꼿꼿이 버티는 것뿐이었다. 시간의 파도가 이제 막 시작된 아이들은 무섭지도 않은지 할멈에게 공을 달라고 떼를 썼지만. 이거, 이거 내 거야! 할멈은 공을 꼭 안고는 갈매기처럼 훨훨 잘도 달아나는 것이었다.
기억을 잃는다는 것만큼 슬픈 일이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들, 좋아했던 음식, 유난히 맑았던 하루, 왁자지껄하게 웃고 떠들던 기억. 그 모든 것을 잊은 채 살아간다는 건 아마 죽음보다 더한 일일 것이다.
치매 환자를 겪어본 적이 있다. 멀쩡히 잘 대답을 하다가도 갑자기 다른 시간 속으로 돌아가 버렸다. 마치 시간여행자처럼. 겁을 먹었다가 화를 내고 웃다가 울었다. 통제할 수 없는 시간의 영역으로 마구잡이 떠나니까 감정도 뒤죽박죽이 되어버릴 수밖에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돌아오지 못하는 수순이다. 켜켜이 쌓아둔 기억 속으로 도망쳐 보지만 결국에 전부 지워지는 영화 ‘이터널 선샤인’처럼. 그들은 현재로 돌아오지 못하고 자신의 영원으로 침잠한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은 그 과정을 꼼짝없이 지켜봐야 한다. 내가 알던 사람이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으로 변화해 가는 경험을 온몸으로 버텨내야 한다.
기억은 온전하지 못하다. 늘 왜곡되고 과장되어 있는 법이다. 내가 잘못했던 게 잘했던 기억일 수도 있고 내가 미워했던 게 사랑했던 기억일 수도 있다. 기억은 편파적이라서 그 위에 시간이 쌓이면 내 마음대로 편집되기도 한다. 나의 잘못이, 실수가 좋게 포장되기도 한다. 아름다웠던 기억이 더욱 아름다워지기도 한다. 천국이란, 어떤 공간이 아니라 나의 아름다웠던 기억 속에 영원히 머무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아름다운 추억이 많은 사람은 천국행이고, 불행한 기억 속에 머무는 사람은 지옥이 아닐까.
죽어서 영원히 자신의 기억 속을 헤맨다고 가정한다면, 거짓과 위선으로 많은 돈과 높은 지위를 만들고 죽은 사람의 기억보다 양심을 지키고 가족과 지인들 사이에서 충만하고 후회 없는 삶을 산 사람의 기억이 더 좋을 거라는 것. 그것이 천국의 자격이라면 사후 세계는 설명이 된다. 천국이냐 지옥이냐의 심판은 외부의 신이 아니라 내 안에 양심이라는 신이 행한다는 것. 노인들이 한결 같이 말하는 게 있다. ‘그때 그걸 해볼 걸’ 하는 후회. 우리의 삶이 도전과 노력, 그리고 다시 나아가는 것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로 인해 나 자신이 행복과 사랑의 기억으로 충만해지는 것에 있다고 생각한다.
성공으로 성취감을 느낀다면 좋겠지만 거듭되는 실패를 통해 포기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실패가 아니다. 진심을 다해 부딪혀 본 일이라면,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의 영혼은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일을 관두고 다른 일에 도전한다고 해서 그걸 포기라고 폄하할 수는 없다. 그의 노력이 다른 쪽으로 전환되었다고 표현하는 게 맞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결국 어디서든 두각을 드러내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하나의 일에 성과를 두고 인생의 성공과 실패로 나누는 건 미련하고 자학적이다.
도전하고 노력하고 실패와 성공을 하고, 사랑을 하고 여행을 하고 주변 사람들의 안부를 묻고 평화를 빌고 배려하고 친절해지는 것. 그런 기억이 쌓여서 지금의 나를 만든다. 기억이 곧 나다. ‘이터널 선샤인’의 두 주인공은 기억을 잊지만, 그들의 영혼은 서로를 알아봤다. 기억이란 영혼에 각인되는 문신 같은 게 아닐까. 당신이 나를 잊은 채 해도 나는 당신을 기억한다. 그리고 당신의 영혼에 나라는 사람도 작은 문신처럼 각인되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서로를 잊지 못한다.
오늘 하루, 아주 작은 일이라도
행복한 기억 하나 더 만든다면
천국에 좀 더 가까워지는 일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