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여인의 집

운명의 정원

by 슴도치

잠이 깬 소녀는 방 문 앞에서 잠옷 차림이었다. 응접실 쪽에서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소녀는 한 손에는 인형을 안고, 다른 손에는 옅은 빛의 랜턴을 들고 있었다. 소녀는 인형 머리의 박음질 부분을 만지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때때로 소녀는 자신이 아니라 인형이 자신을 만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둠이 벌레떼처럼 소녀 주변을 감쌌다. 랜턴을 들어 어둠을 쫓았지만 그것은 쫓는다고 쫓아질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응접실에 다다랐을 때 말소리가 들렸다. 그곳에는 세 명의 여자가 있었다. 바닥에는 실타래의 실이 거미줄처럼 흐트러져 있었다. 그들은 싸우거나 울거나 웃는 목소리로 속삭이고 있었다. 그 내용은 중요하거나 사소하거나 혹은 소녀에 관한 이야기일 수도 있었다. 촛불이 일렁이면서 그들을 할머니처럼 때로는 완숙한 여인처럼, 어쩌면 소녀 나이 또래에 아이들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소녀는 그들의 정체가 궁금했지만 감히 다가갈 수 없었다. 사실 그들에 대해 아는 게 두려웠다.



그들 중 한 명이 소녀를 보았고 아니 그들 모두가 소녀를 보았고 아니 그들은 소녀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소녀는 자신의 운명에 대해 묻고 싶었지만 그들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거나 모든 것을 알려줄 것 같았다. 소녀는 얼른 이 집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소녀는 자신이 도대체 언제부터 이 집 안에 있었는지 떠올릴 수 없었다. 인형이 소녀의 귀에 대고 도망치라고 말했다. 놀란 소녀는 랜턴을 들고 무작정 뛰기 시작했다. 복도를 지나 계단을 내려가고 올라가고 소녀는 어둠을 쫓거나 쫓기는 것처럼 뛰었다. 그러나 그것은 쫓는다고 쫓아질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저쪽에서 희미한 빛이 보였다. 소녀는 자신이 응접실에 다다랐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 이렇게 되었다며 인형이 소리 없이 울었다. 소녀는 이미 세 명의 여자들 사이에 서 있었다. 아니 처음부터 그들과 있었다. 이미 모든 게 정해져 있다면 왜 살아가야 할까. 그들 중 한 명이 아니 모두가 말을 했다. 소녀는 비로소 아무것도 모르고, 모든 걸 알게 되었다. 잠이 깬 소녀는 방문 앞에서 잠옷 차림이었다.







운명의 세 자매는 가장 대표적인 형태가 바로 그리스의 모이라이(Moirae), 로마에서는 파르카(Parcae)로 불렸다. 세 자매의 역할은 첫째 클로토(Clotho)가 ‘실을 잣는 자’로 인간의 생명의 시작을, 둘째 라케시스(Lachesis)는 ‘실의 길이를 재는 자’로 인간의 삶의 길이를, 셋째 아트로포스(Atropos) ‘실을 끊는 자’로 죽음의 순간을 결정했다.



세상의 모든 인간, 심지어 신들의 왕 제우스조차도 그들이 정한 “실의 길이”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었다. 제우스가 신들의 왕이라 해도 운명의 실을 자를 권한은 없었으며 그것이 바로 그리스인들이 본 ‘운명(Ananke, 필연)’의 개념이었다. 즉, 운명은 신의 의지가 아니라, 신조차 복종하는 우주의 질서라는 것.



운명의 세 자매는 세상 어디서나 형태와 이름만 다를 뿐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로마에서는 파르카 (Nona, Decima, Morta), 북유럽에서는 노른(Norns: Urd, Verdandi, Skuld), 동양에서는 삼신(三神) 혹은 삼태성(三台星), 삼신할미라고 불리는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신 또한 우리는 단일 신이라고 알고 있지만 사실은 세 명의 신을 뜻한다.



인간은 언제나 자신의 운명을 궁금해한다. 그리고 그 운명을 이야기할 때 꼭 등장하는 의문점 하나. 운명이란 만들어 나가는 것인가. 이미 만들어져 있는 것인가. 나는 이 의문점에 꽤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운명이란 이미 만들어져 있는 토대 위에서, 인간이 선택이란 도구로 조금씩 바꿔나가는 행위라는 것.


태어나면서부터 좋든 싫든, 인간의 운명은 어느 정도 정해져 있는 게 사실이다. 일단, 부모와 환경을 선택할 수 없다는 점에서부터 그렇다. 노력과 의지만으로 바꿀 수 없는 지점이 분명히 있다. 그러나 역경을 딛고 불우한 가정환경에도 성공한 사람들은 많다는 논리라면 그들은 그런 ‘운명’을 타고난 것이라고 답해주고 싶다. 운명이란 길고 거대한 다리와 마찬가지다. 그 다리의 겉모습이나 일정 부분을 변경할 수는 있지만 다리의 방향을 바꿀 수는 없다.



그렇다면 어차피 정해진 일이니까 포기하며 관망하는 자세로 살아야 할까? 아니다. 모든 것이 정해져 있더라도 그 일은 겪는 사람은 나라는 존재다. 그리고 거대한 흐름은 바꾸지 못하더라도 세부적인 요소, 갈림길의 선택. 그러니까 운명의 디테일을 정하는 건 바로 나다. 니체의 영원회귀에 따르면 우리는 똑같은 인생을 무한히 반복하며 산다. 나는 바로 그 지점에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해진 운명 속에서 매번 같은 실수를 하는 게 아니라, 조금씩 나아지도록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다고 말이다.



좋은 운명이냐, 나쁜 운명이냐 따지기보다는 나의 운명을 더 나은 쪽으로 선택할 수 있다면 우리는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고 다듬어주어야 한다. 마치 정원을 꾸미듯이 말이다. 저 옆 집에 정원이 더 크고 웅장하더라도 내가 내 정원을 열심히 가꾼다면 남의 정원이 부럽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 누군가 와서 바꾸자고 해도 싫다고 답할 것이다. 왜냐하면 ‘애정’이 있으니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그런 점이다. 내 운명이 정해져 있고 심지어 힘들고 나쁜 운명이라고 할지라도 주어진 운명 안에서, 선택의 순간에서 한 발자국 나아가는 옳은 결정을 내리는 것. 우리의 영혼은 그 순간에 성장하고 그 성장이 쌓이고 겹치다 보면, 결국에는 운명조차 초월할 존재가 될 수도 있다.



인생이라는 남의 집 같은 시간 속에서, 모든 게 너무 어둡고 두렵다고 하더라도 어쨌든 내일은 온다. 피할 수가 없다. 운명이라는 자신의 정원을 자신만의 의문과 정답으로 가득 가꾸게 된다면, 언젠가는 자신의 운명조차 사랑할 날이 분명히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