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함을 향한 가장 잔혹한 길
두 가지 길이 있다. 안전한 길과 위험한 길. 한쪽 길은 테두리 안에서 편하게 하고 싶은 만큼 하면 된다. 그리고 다른 길은 자신을 밀어붙이고 한계를 넘어 끝까지 가는 길이다. 어느 길이 더 나은 길이라는 정답은 없다. 하지만 한 가지 분야에서 정통하고 싶다면 그만하면 잘했어.라고 자위하지 않는다. 그들은 최후까지 만족하지 못하고 자신을 단련한다. 그리고 그 분야의 최고가 아니라 그 분야 자체가 되어버린다.
영화는 고정된 삼각대 촬영만 한 게 아니라, 손에 들고 흔드는 카메라(핸드헬드) 기법을 자주 쓴다. 그것으로 인해 미세하게 흔들리고, 관객은 마치 연주실이나 리허설 현장에 직접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카메라가 연주자의 손, 드럼 스틱, 심벌, 땀, 손가락 등 디테일을 좇아 흔들리면서 초점을 옮길 때, 관객은 마치 현장에 있는 것처럼 등장인물에게 불안감과 몰입감을 동시에 느낀다. 연주 장면이나 길거리를 보여줄 때도 단순히 음악이 배경으로 흐르는 게 아니라, 영상 컷이 재즈 드럼의 박자 혹은 템포 변화에 맞춰서 바뀌는 부분이 흥미롭다. 이 방식 덕분에 화면 전환이 음악의 비트처럼 느껴지고, 관객에게 영화 전체가 하나의 퍼포먼스처럼 다가온다.
플레쳐(J.K. 시몬스)는 채찍 같은 남자다. 그는 영화 내내 검은색 옷을 입고 등장인물 모두에게 자신을 휘두른다. 대부분은 그 채찍질에 맞아 울고 포기하고 도망친다. 제2의 찰리 파커를 만들기 위해 존스가 던진 심벌즈가 되기로 한 플레쳐에게 그의 방식에 실패한 사람은 찰리 파커가 아니었던 사람이지, 동정의 대상이 아니다. 그는 잠재력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자극을 줘야 한다고, 고통을 통해 끊임없이 단련해야만 정점에 오를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런 일념하에 당연하다는 듯 앤드류(마일즈 텔러)를 피와 땀으로 쥐어짠다.
앤드류는 처음에는 유약한 소년의 모습이지만 영화가 진행됨에 따라 플레쳐와 동급, 아니 플레쳐보다 더한 인간이 된다. 처음에 그는 플레쳐를 두려워하지만, 갈수록 플레쳐와 대립하고 맞선다. 그것은 플레처의 견해대로 앤드류가 그 모든 비난과 인신공격을 통해 자신을 단련하고 정점에 서고자 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극 중에서 점점 플레쳐의 철학을 내면화하고 성공을 위해 인간적인 면을 제거한다. 자신의 꿈을 위해 여자친구에게 이별을 선언하고, 다른 사람의 꿈은 따분하고 시시해 보인다. 결국 자신 역시 ‘위대함’이라는 이름 앞에 선 괴물이 되어간다. 하지만 팽팽하게 당긴 시위는 언젠가 끊어지기 마련이다.
영화의 대미는 플레쳐가 드디어 자신의 연주를 하기로 마음먹었을 때다. 그는 더 이상 플레쳐의 지휘를 받지 않고 자신이 연습했던 곡 자체가 된다. 템포는 무섭게 빠르고 리듬은 난폭하고 솔로는 폭발할 지경이다. 음악이 아니라 훈련소의 포격 같은 소리. 곡명 '카라반'은 그 자체로 플레처가 만든 군사 훈련장, 즉 폭력적 재능주의의 상징이 된다. 앤드류와 플레쳐는 증오하고 죽이고 싶어 하면서 드디어 서로를 인정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오직 앤드류만이 플레쳐의 방식으로 완성된 인물이다. 앤드류는 플레쳐의 신호가 아닌, 자신의 신호대로 움직이기 시작하고 결국 카라반의 정점에 다다른다. 그는 결국 그들이 원한대로 “위대한 연주자”의 모습에 닿지만, 그건 인간적인 행복과 등가 교환된 결과다. 앤드류는 이제 그의 아버지나 니콜(멜리사 베노이스트)처럼 살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끝없는 사막을 횡단하는 카라반에 이제 막 올라탔으니까. 영화 말미에 플레쳐와 앤드류가 서로를 마주 보며 웃는 장면은 그래서 섬뜩하다. 그들이 자신들의 지옥을 온전히 받아들였고 서로에게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마치 악마들의 계약서 서명이 막 끝난 것처럼. 위플래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