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란 울프,『아들러의 격려』
위 문장과 함께 책은 끝난다. 마지막 문장을 읽는 순간, 아주 오랫동안 내 속에서 나오지 못했던 무언가 뭉클한 것이 솟아오르는 기분이다.
1931년 출간된 이 책의 원서 제목은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을까』이다.
저자인 베란 울프는 알프레트 아들러 박사 밑에서 공부하며 조수로 일한 사람이다. 아들러 심리학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에 아들러의 수많은 연구자료를 모아 책 한 권에 담아낼 수 있었다. 저자는 일상 속에서 연약한 인간이라는 생물이 부딪히게 되는 모든 문제, 즉 고립감이나 고독에서부터 억압, 허영심, 고민, 야심, 현실 도피, 품위 있게 나이를 먹어 가는 법 등에 이르는 온갖 문제를 다룬다. 특히 적절한 실례들을 소개하면서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수년 동안 자기계발서가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다. 인기를 끄는 데야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깊은 곳에는 ‘나’를 소중히 하고, 나의 가치를 높이고 싶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가치 있는 삶이란 무엇인가? 행복하기 위해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정말 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은 것인가. 나는 어떤 사람인가. 앞으로 무엇이 되고 싶은가. 우리는 끊임없이 묻는다.
스스로와 대화를 나누고 자신과 친해질 때 나를 이해할 수 있다. 나를 이해했을 때 비로소 자신의 인생이 행복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나라는 사람에 대한 이해의 기반에는 타인이 있다.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게 되는 것이다.
누군가로 인해 행복하거나 슬퍼해 본 사람들은 안다. 나의 감정이 나만의 감정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그러므로 자랑스러운 나를 만나기 위해 묵묵히 혹은 열심히 발걸음을 떼기도 하고, 때로는 그대로의 나로 살아가기 위해 타인과의 공감을 포기하고 살아가기도 한다. 그러나 인류는 언제나 집단생활을 영위해왔고, 개인은 신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고립되어서는 살 수 없으며 행복해질 수도 없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언제나 내 머릿속을 맴돌았던 질문들이다. 왜 이런 질문들을 쉽게 떨칠 수 없었는지 이제야 겨우 이해할 수 있겠다. 나는 언제나 삶이란 질문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잘 살고 싶었기 때문에, 안정된 환경 속에서 자부심을 충분히 느끼며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누군가와 비교하는 것은 괴로웠지만, 누군가를 인식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실 속에서 나는 어쩌면 열등감에 휩싸여 있었는지 모른다.
이 책의 부제는 ‘열등감이 당신에게 날개를 달아줄 것이다’이다.
열등감이 없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모두 열등감을 가지고 살아간다. 자연은 식물이든 동물이든 인간이든 모두 항상 높은 수준의 생활력을 지니도록 배려하고 있고, 또 어떤 결함이든 상쇄시키려는 태세를 갖추고 있다. 자연은 ‘마이너스’ 부분을 발견하면 두 배의 ‘플러스’를 만들어 내려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이 시사하는 바는 정말 해내어야 하는 일이라면, 불편함을 편안하게 만들 수 있도록 환경적 조건과 정신적 인식을 바꾸라는 것이다.
나는 왼손잡이다. 왼손잡이로 살아가는 것은 내 선택사항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오른손잡이에 맞춰져 있는 세상에 나를 최적화시키기 위해 매번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불편하다고 느끼며 불만을 가진 적은 있었지만, 열등감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런데, 왼손잡이라는 상황에 대해서 끊임없이 의식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어쩌면 열등감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는 열등감을 느꼈을 뿐, 열등콤플렉스에 빠지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아들러는 열성과 열등감, 열등콤플렉스를 서로 다른 차원의 것으로 설명한다. 열성은 눈에 띄게 드러나는 우성의 반대 형상이고, 열등감은 심리적 갈등이 수반되는 상태, 열등콤플렉스는 심리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신체적인 증상도 동반한다. 편두통, 신경성 소화불량, 권태감, 식욕부진, 일반적인 부정형 신체증후군 등의 증상이 그러하다.
아들러는 열등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인생의 여러 문제에 대해 장애나 핸디캡을 참된 재산으로 바꾸어 나가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다고 격려한다.
모든 인간이 느끼는 부족함을 채우는 방법을 아들러는 ‘어울림의 기술’이라고 말한다. 서로 어울려 사회적 의의가 있는 일을 하면서 자신의 한계를 넓히기 위해 노력하고, 삶에 대한 참된 열정을 고취시키기 위한 취미를 개발해 나가다보면 참된 행복에 가까이 갈 수 있을 것이다.
아들러가 말하는 완벽하고 행복한 인간이 내 인생의 목표일까.
다시 생각해본다. 당장 필요로 하는 것을 충족시키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으면 행복해질 수 없다. 행복을 발견하려면 좀 더 넓은 범위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궁극적인 목표는 크게 변화하지 않았지만, 환경의 변화에 따라 내가 사용하는 도구는 늘 변했다. 다양한 환경에 대처하려고 사용하는 도구는 늘 자기만의 논리가 있다.
중학교 시절 나는 조용하고 얌전한 아이였다. 선생님 말씀도, 부모님 말씀도 잘 듣는 편이었던 듯하다. 친구들은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내게 무리한 부탁을 하기도 했다. 무리하고 무례한 부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때의 나는 거절하지 못했다. 그것이 못내 가슴 속에 아프게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고등학교로 올라가면서 나는 도구를 바꾸기로 했다. 불편한 상황에 대해 모르는 척하기보다 직면하기로 말이다. 덕분에 고등학교 시절의 친구들은 내 성격이 털털하고 괄괄하며 명랑한 줄 안다. 그 시절 나를 지배했던 것은 누군가가 나를 쉽게 대하지는 못하지만, 좋은 사람이라고 느낄 수 있도록 나를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행복을 찾아갈 줄 아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스스로 필요로 하는 것을 찾아 멋진 인생을 위한 도구를 계속 개발해나갔기 때문이다. 핸디캡을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훈련을 계속해왔고, 올바른 길을 걸어가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과거를 되돌아보고 기록하는 일도 멈추지 않았다.
인생에서 적절한 시기에 도구를 바꿀 줄 알았다는 것은 인생을 지연시키지 않을 수 있는 중요한 요소였다. 앞으로도 해야 할 모험이 많다. 시도해보고 실패를 하는 쪽이 더 낫다는, 내 ‘용기’를 통해 나의 열등감이 날개를 달고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