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 「시를 쓰면 비명도 날개가 된다」, 『최소의 발견』
유목민은 스스로를 유목민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들의 몸에는 유목의 대척점인 정주의 흔적이 없는 까닭이다. 한곳의 집과 뿌리를 가졌던 자만이, 그러나 어느 날 그것에 온몸이 통째로 타본 자만이, 그리고 흉터가 뒤덮인 그 몸으로 세상을 떠돌게 된 자만이, 유목민이라는 말을 새로운 유전자로 갖는다. 나는 시를 쓰는 사람이 되고 나서도 낮에는 햇빛이 낯설고 밤에는 불빛이 낯설다. 아니 점점 더 낯설어진다. 어느 곳에도 온전하게 속하지 못하는 나는 이제 부재만이 나의 유일한 존재 방식이라는 것을 안다. 느닷없이 죽음과 함꼐 살게 된 어렸을 때보다 지금의 몸이 더 많은 비명으로 꽉 차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나는 이제 뿌리를 갈망한 적이 있었다고, 그러나 그것을 가질 수 없는 존재가 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담담하게 얘기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삶과 싸워 이겨야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한없이 달래고 쓰다듬어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누구나 그렇듯이 비명 지르고 싶은 시간들이 내게도 있지만 바로 그 순간 비명을 몸 안으로 넣고 밖으로 꺼내지 않으면 비명이 삶을 일으켜 세워 준다는 것도, 비명이 내 날개가 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래, 나는 이제 삶이 그리 비장하지 않은 것임을 안다. 시가 내게 그것을 가르쳐 주었다.
이원, 「시를 쓰면 비명도 날개가 된다」, 『최소의 발견』
오래된 산문집을 다시 꺼내어 읽는다.
언제 어떤 기로로 내게 닿은 책인지 모르지만,
내 집 안 어느 곳에 꽂혀 있던 글이 비로소 내 안에 가 닿는다.
비명이 삶을 일으켜 세운다고, 비명이 날개가 된다고
이원은 말하지만,
그 비명에 아파하는 자신을 눌러둔 오랜 세월 동안 아팠다고 그가 울부짖는 것처럼 내게는 들린다.
삶과 내내 악다구니를 쓰는 동안
힘겹고 외로웠던
죽음을 가까이 한 영혼의 조용한 비명을 쓰다듬어줄 시간이다.
삶을 비장하게 살아봐야 무엇하겠는가.
이제 세상은 월요일, 오후의 시작일 뿐인 것을.
그렇게 사라지지 않는 기억을 붙들고
살아내야 하는 매일을 우리는 힘겹게 견디고 있는 것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