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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숨김 Nov 04. 2019

언젠가 다시 그 곳에 간다면

손님 / 29 June 2019 @ 섬

좋았던 여행에 대한 기억은 보통 여행지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남겨지며,

그 곳에서 얼마나 환영받았는가에 대한 잔잔한 감동에서 비롯된다. 


보통 별로인 기억들은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았다거나, 숙소가 불편했다든가 하는 

기본적인 것들이 부족했을 때, 하지만 여행 중이니까 감수해야지, 하고 넘기게 되는 것들인데

반대로 기본적인 것들에서 손님에 대한 주인의 따뜻한 배려가 느껴진다면 

그게 더욱 큰 감동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재작년 겨울, 친구와 함께 모로코로 여행을 갔을 때였다. 우리는 첫 도시 페즈에서 3일 동안 묵을 숙소를 제외하고는 그 이후의 일정은 마음가는대로 모험을 해보자며 아무것도 정해놓지 않았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그것은 정말 무모하고도 다시 없이 잘한 결정이었다. 안 그랬다면 절대 그 이후의 경험들을 할 수 없었을 테니까. 

우리는 거의 모든 여행 루트를 현지인에게 물어보고 짰다. 모로코 사람들은 자신들의 나라에 찾아온 외국인 손님들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고 도움을 주고자 했는데, 중요한 것은 그 사람들이 믿을 만한 사람인지, 아니면 여행자들을 등쳐먹는 사기꾼인지를 판별하는 일이었다. 처음엔 영락없이 당하기도 했지만 나중에는 점점 흥정에 익숙해져서 처음 제시했던 가격이 반의 반토막이 되는 마법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그렇게 얻은 정보가 꽤나 쏠쏠하다는 점이었다. 물론 간혹 댓가를 지불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말이다. 가장 쓸만하고 안전한 정보들은 숙소 주인에게서 얻은 것들이었다. 보통 첫날 숙소에 도착하면 주인들은 그다음 행선지가 어디인지 물었고, 가장 좋은 루트나 매력적인 장소들을 추천해주었는데, 돈을 주고 머무르는 개념 이상의 이런 친절함과 섬세한 배려는 방문한 손님들이 숙소를 떠나서 모로코라는 나라에 대해 빠르게 친근함을 갖게 하는데에 충분했다. 


천년전 왕조의 수도였던 오래된 도시 메크네스에는 400년동안 한 가족이 대대로 운영해오고 있는 전통가옥이 있었다. 한밤중에 도착했는데도 숙소에서 사람이 올드타운 입구까지 나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고, 숙소에 도착하자 여주인이 나와 우리의 짐을 옮겨준 뒤 민트티를 권하며 다음 행선지가 어딘지 물었다. 우리는 그 다음 일정으로 사하라 사막을 갈 생각이었기 때문에 좋은 숙소를 추천해줄 수 있는지 물었고, 여주인은 마침 자기가 몇 주 전에 가족들과 사막으로 여행을 다녀왔던 곳이 정말 좋았다며 그 곳 주인을 연결해주겠다고 했다. 그렇게 우리는 모하를 만나게 되었다. 


사막에서 태어나고 자란 모하는 베르베르 족 특유의 서글서글한 눈매에 투박한 인상을 가진 남자였다. 거의 8시간을 나이트 버스를 타고 동틀녘에 도착한 우리는 피곤에 지쳐있었고, 그는 눈치빠르게도 그런 우리를 더이상 기다리게 하지 않고 따뜻하고 좋은 방으로 안내해 주었다. 한숨 자고 일어나니 점심 때가 지나있었고, 우리 말고는 아무도 없는 텅빈 식당에서 느긋하게 빵과 치즈, 과일로 간단히 요기를 한 뒤 밖으로 나왔다. 


모하가 운영하는 카스바 모하윳은 사하라 사막의 입구인 메르주가에 위치해 있었고, 걸어서 10분 정도만 가면 모래언덕들이 있을 정도로 사막과 가까웠다. 우리는 끝이 보이지 않는 드넓은 모래 언덕에서 펄쩍 뛰면서 사진을 찍다가 우리를 흥미롭게 지켜보던 또다른 베르베르 족 이디에르를 만나게 되었다. 벌어진 앞니 때문인지 왠지 모르게 순박해보이는 얼굴로 우리에게 어디서 왔냐고 물으며 원한다면 근처를 안내해주겠노라고 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사막을 벗어나본 적이 없다는 그는 여러 나라의 언어를 할 줄 알았고 페이스북이 취미라고 했다. 사막을 찾는 전세계의 여행자들을 통해 인터넷으로 다양한 세계를 경험하는 것이 삶의 낙이며, 언젠가는 저 멀리 있는 가장 커다란 모래언덕을 넘어 알제리아에 가볼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하지만, 이 곳에 자기 누이들과 가족들을 두고 떠날 수는 없다고 했다. 우리는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나누면서 사막에 흐르는 수로와 우물, 마을 사람들이 일구는 밭과 다양한 식물들을 구경했다. 그는 매일 밤마다 사막의 별을 보러 나온다면서 원한다면 함께 가도 좋다고 했고, 우리는 저녁을 먹고 다시 만나기로 했다. 


다시 숙소에 돌아와 따뜻한 타진과 쿠스쿠스 요리를 먹으며 우리는 그를 믿고 밤에 나가도 되겠는지에 대해 의논했다. 아무리 좋은 사람같아 보여도 혹시 모르는 거니까. 고민하고 있는데 마침 모하가 다가와 식사가 맛있는지 물었다. 우리는 그에게 우리가 만난 이디에르에 대해 얘기했고, 밤에 사막에 나가 별을 봐도 위험하지 않겠는지 물어보았다. 모하는 진한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이디에르라는 이름이 많기 때문에 어떤 이디에르인지 자기가 확인해봐야겠다고 대답했다. 저녁을 먹고 난 후 우리는 모하와 함께 밖으로 나가 이디에르를 불렀다. 잠시 후 어두운 덤불 너머에서 이디에르가 나왔고, 그의 얼굴을 확인한 모하는 반갑게 포옹하며 이 사람은 좋은 친구이니 믿어도 좋다고 말했다. 도시에는 좋은 사람만큼 나쁜 사람도 많은데다 거리도 복잡하지만, 사막은 도시와 달리 넓고 숨을 데가 없기 때문에 훨씬 안전하다고, 하지만 너무 늦게까지 있으면 위험할지도 모르니 우리를 10시 전까지는 숙소까지 데려다줘야 한다고 이디에르에게 당부하고는 들어갔다. 그의 뒷모습이 마치 든든한 사촌오빠같이 믿음직스럽게 느껴졌다. 


겨울의 사막은 해가 빨리 져서 밤이 길었고, 바람이 세게 불어 추웠다. 칠흙같은 밤하늘 아래서 오직 달빛과 휴대용 전등에 의지해 우리는 사막의 모래언덕을 타고 저 멀리 보이는 큰 나무로 향했다. 모래 언덕에 남겨져있던 우리의 발자국은 세차게 부는 사막의 바람에 금새 지워졌고 뒤돌아보니 우리가 걸어왔던 길이 어디인지조차도 분간이 되질 않았다. 우리는 그저 이디에르만 믿고 가는 수밖에 없었다. 나무 아래에 다다르자 바람이 고요해졌고 그제서야 우리는 마치 수많은 별이 각각의 빛을 발하고 있는 맑은 밤하늘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모하의 당부대로 이디에르가 숙소 앞까지 다시 데려다준 덕분에 우리는 안심하고 돌아올 수 있었고 다음날 아침, 우리는 낙타를 타고 사막 한 가운데로 떠났다. 낙타를 타고 한참 가다가 캠프에 필요한 물건들을 가져다놓고 돌아오던 모하와 마주쳤다. 그는 우리가 어젯밤에 별탈없이 잘 돌아왔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일정상 우리는 사막 캠프에서 하룻밤만 머무르고 다른 일행들과는 달리 아침 7시에 버스를 타러 떠나야 했기 때문에 모하는 자신이 새벽에 우리를 직접 데리러 오겠노라며 약속하고는 숙소로 돌아갔다. 


고요했던 전날밤과는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우리는 가장 높은 모래언덕 위에 올라가 광활한 사막의 풍경을 스케치하고, 모래 언덕에서 썰매를 탔다. 저녁이 되고 해가 지자, 다른 일행들도 캠프로 모였다. 우리는 저녁을 먹으며 베르베르 족의 전통 음악 공연을 듣고, 다 함께 춤을 췄다. 너무나도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텐트로 돌아온 우리는 새벽에 떠날 준비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선잠이 들었다. 

깊게 잠들지 못했던 나는 계속 뒤척거리다 일어났다. 시계를 보니 벌써 새벽 5시 반이었는데 밖은 고요했다. 모하가 우리를 데리러오고 있다면 어디선가 소리가 들려야했다. 나는 자고있던 친구를 깨워 함께 밖으로 나왔다. 

캠프 안은 고요했고, 우리밖에 없었다. 다른 일행들은 일출을 보러 떠난듯 했다. 우리는 누군가 있길 바라면서 캠프에 있는 모든 텐트를 둘러보았다. 부엌에서 한 사람이 나왔지만 언어가 통하지 않았다. 손짓발짓으로 겨우 핸드폰을 빌려 전화를 했지만 신호가 가질 않았다. 여긴 사막이니까. 높은 언덕으로 올라가 보았지만 아무런 미동도 없이 고요한 모래 언덕들만 있을 뿐이었다. 우리가 아침 7시에 타야했던 버스는 마라케시 행이었고 무려 12시간을 달려야하는 일정이었다. 가서 묵을 숙소도 이미 결제해놓은데다 심지어 사막 투어 때문에 돈을 더 주고 일정을 변경해놓은 상태였다. 여기서 정류장까지는 차타고 30분은 넘게 걸리는데... 이미 오전 6시가 지나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사막 한가운데에서 텅빈 캠프에 덩그러니 둘이 있으려니 마치 고요함이 몸을 짓누르는 것 같이 느껴졌다.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결코 어딘가에 닿지 않고 허공에서 사라져버리는 먹먹함. 이제 어떻게 해야할지도 모르겠고, 자포자기한 상태로 우리는 하염없이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때였다. 언덕 저 멀리에서 뿌옇게 모래 먼지가 날리기 시작하더니 모토 소리가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사막용 바이크가 달려오더니 우리 앞에 멈춰섰다. 바로 모하였다. 우리를 데리러 오다가 모래구멍에 바퀴가 빠져서 늦었노라고... 그는 우리에게 숙소에 차를 보내라고 연락했으니 그걸 타고 일단 숙소로 가서 짐을 챙기라고 하며 버스값은 자기가 보상하겠다고 걱정말라고 했다. 잠시 후 커다란 바퀴가 달린 차가 도착했고 우리는 급하게 몸을 실었다. 모래 언덕 위를 마치 청룡열차처럼 위로 아래로 엄청난 속도로 달리는 차 안에서 울렁거리는 속을 겨우 참고 내려서 짐을 싸고 부엌으로 쳐들어가 아침거리를 싸달라고 했다. 시계를 보니 이미 7시가 넘어 있었다. 버스는 떠났고 어떻게 해야할지 난감해하고 있는데 우리를 태우고 온 기사분이 차에 타라고 하더니 우리를 다른 리조트로 데려다 주었다. 어리둥절해하며 내렸는데 모하가 우리에게 다가와 말했다. 여기 리조트 주인과 친구이고, 사정을 얘기해놓았으니 다른 여행자들과 함께 여기서 제공하는 밴을 타고 가면 된다고. 시간 내에 도착할테니 걱정하지 말고 일단 여기서 아침부터 먹으라며. 정신없는 와중에 그의 배려에 감동하며 아침을 먹고, 벤을 타고 출발했다. 벤에 짐을 실어주면서 그는 몸 조심히 잘가라며, 목적지에 잘 도착할거라며 끝까지 안심시켜 주었다. 우리가 원래 타려던 버스는 거의 50명이 타는 2층 고속버스였고 12시간 중 쉬는 시간이 2번밖에 없는 일정이었는데, 이 벤에는 우리를 포함해 6명밖에 없어 편하게 앉아서 갈 수 있었는데다가 우리가 배고프거나 쉬고 싶을 때 멈출 수 있었다. 심지어 가는 데에 10시간도 안걸려서 원래 우리가 예상했던 도착시간보다도 일찍 도착할 수 있었고, 그 덕분에 숙소 체크인도 제시간에 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모든 게 그의 덕분이었다. 아니, 어쩌면 모래 구멍에 빠진 바퀴 덕분일지도 모른다. 그 이후의 여행에서도 우리는 물론 좋은 숙소 주인들을 만났지만, 그만큼 우리에게 강한 신뢰감을 준 사람은 없었다. 비록 짧은 시간동안 머무르면서 얘기도 많이 나눠보지 못했지만, 타지에서 온 낯선 여행자를 자신의 숙소에서 머무르는 손님이라는 이유만으로 마치 자신의 여동생들처럼 든든하게 챙겨주었던 사람. 


주인이 손님에게 제공해야하는 것은 단지 좋은 시설이나 서비스뿐만 아니라 따뜻한 배려와 안전함이어야 할 것이다. 낯선 곳에 와서 누구를 믿어도 좋을지 모르는 여행자들에게 그것은 잔잔한 감동과 믿음으로 남게 되고, 그리고 그 감동은 그 도시 전체에 대한 감상이 되는 것이다.  


언젠가 다시 사막에 간다면 머물게 될 곳은 반드시 그 곳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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