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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숨김 Nov 04. 2019

할머니의 버킷리스트

26. Juli @ 섬

3일 간의 장례 절차가 모두 끝났다. 3일 내내 웃는 얼굴로 조문객을 맞이하던 가족들은 발인을 할 때는 왠지 씁쓸한 얼굴로 지친 듯 다들 말이 없었다. 입에는 고요한 웃음을 짓고 있었지만 눈들은 슬펐다. 장례식장에서 조문객을 맞이하기보다 식당에 앉아 얼굴이 빨개지도록 술만 마시던 작은 삼촌만이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갑작스럽게 치뤄진 상치고는 그 어느 장례식장보다 붐볐던지라 오랜만에 모인 가족들은 반갑게 인사를 나누기가 무섭게 각자 상복을 입고 손님을 맞이해야 했다. 친가는 6남매였기에 조문객이 넘쳐났고, 첫날 자리잡았던 식장이 너무 좁아 둘째날부터는 가장 큰 장례식장으로 옮겼다. 둘째인 아빠를 비롯한 삼촌들은 12시간 넘게 계속되는 조문객에 인사를 하느라 앉았다 일어났다를 끊임없이 반복했고 결국 친척 동생이 무릎에 붙이는 파스를 사와야 했다. 입구부터 복도를 가득 채운 화관들과 이름들을 본 다른 장례식장에서 와서는 "이 집은 고인이 무슨 정치라도 하셨었나베? 장례식장이 아주 화려하네. 아니면 고인이 아주 자식 농사를 그냥 잘 지었나봐," 하며 인사치레같은 말과 함께 궁금해죽겠다는 눈길로 쳐다보고는 사라졌다. 발인 직전 새벽, 나는 친척동생들과 함께 구역을 분담해 화관과 화분에 적힌 이름들을 확인하고 모두 옮겨적었다. 모두 할머니의 자식들인 6남매의 지인들이었고, 할머니의 지인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90세가 넘으셨었기 때문에 주변 지인들도 돌아가셨거나 방문하기는 힘들으셨으리라. 

12월의 묘지에 부는 바람은 유독 차가웠다. 하필 이렇게 추울 때 돌아가시다니. 땅 속은 더 추울텐데, 하고 작은 고모가 중얼거렸다. 묘소에 들러 장례 절차를 밟고 여섯 가족이 모두 다 함께 근처 순대국집에 가서 다 함께 순대국을 먹었다. 못다한 이야기들은 다음 주에 다시 만나 나누기로 하고는 각자 집으로 흩어졌다. 


일주일 후 우리는 할머니 댁에 모여 유품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함께 살던 고모가 먼저 얼추 정리를 해놓기도 했지만 거의 30년 넘게 사셨는 데도 짐이 별로 없었다. 그저 자질구레한 것들, 자식들과 손주들 사진이나 앨범, 그리고 쌓여있는 옛날 신문들과 안경, 오래된 약봉지와 비타민, 그리고 얼마 안되는 옷가지들. 그 흔한 장신구 하나 한 줌도 안되었다. 딱히 내가 할일은 없어보였다. 말없이 사진을 뒤적거리던 첫째 고모가 호들갑을 떨며 엄마에게 말했다. 

"이것 좀 봐바 언니, 둘째 오빠 옛날 유학시절 사진이네!"

엄마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네, 이때 우리가 데이트하고 있을 때지." 

"어머 그러게, 이 때도 아주 그냥 훤칠했네!" 

고모가 펼쳐놓은 앨범들에 다들 붙어 구경하는 동안, 지루해진 나는 안방에 있는 화장실에 가서 손을 씻었다. 엄마 아빠의 연애스토리는 이미 백번도 넘게 들었기 때문에 거의 외우고 있었다. 잠시 거울을 보다 나와 안방을 둘러보았다. 안방은 할머니가 쓰셨던 방이었다. 왼쪽에 자개장롱이 있었고, 그 옆에 화장품보다 샘플들로 가득한 화장대가 놓여있었다. 할머니가 아프시기 전, 명절에 가족들이 선물해드렸던 고가의 화장품이 거의 새 것처럼 그대로 있었다. 화장대에 달린 서랍을 열어보니, 종이 쪼가리들로 꽉차 있었다. 주로 공과금, 광고 등의 잡다한 우편물들이었다. 이걸 왜 안버리고 계속 두셨담, 하고 다른 쪽 서랍을 열어보곤 잠시 멈칫했다. 서랍 속에는 손주들이 썼던 편지들이 들어있었다. 왠지 뭉클해져서 손을 집어넣어 한 뭉텅이를 꺼내는데 왠지 묵직한 것이 아래에 잡혔다. 수첩이었다. 

검은 색의 가죽 커버 수첩은 어디선가 홍보용 달력들과 함께 받으신 듯 겉에 크게 회사 이름이 써져있었고, 앞은 달력, 뒤는 메모지가 있는 전형적인 회사수첩이었다. 할머니가 평소 뭔가를 쓰셨던가, 싶어 열어보니 역시 대부분 비어있었다. 맨 뒤에는 우리 가족들의 연락처가 빼곡하게 적혀있었다. 혹시라도 뭔가 있을까 싶어 넘기다 보니 사진 한 장이 들어있었다. 사진에는 2003년 7월 26일에 찍혔다는 날짜와 함께 파란색 대문의 오래되어 보이는 집이 찍혀있었다. 여긴 어디지, 하고 무심코 넘긴 뒷면에 할머니가 쓴 듯한 글씨가 보였다. '그리운 우리집.'

분명 내가 아는 할머니 집은 아닌데, 어딘가 낯이 익은 듯한 느낌이었다. '아 혹시..... 그 집인가?' 뭉글뭉글 서서히 기억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부모님이 두 분 다 직장생활을 하셨던 내가 어렸을 적, 나는 약 3년 정도 할머니의 손에서 자랐다고 했다. 선생님이었던 엄마는 학교에 출근하기 전에 나를 할머니에게 맡기고 가곤 했다고 그랬다. 너무 어렸을 때라 기억이 나진 않지만, 어릴 때는 말씀이 없으시고 무뚝뚝한 할머니가 왠지 조금 멀고 무섭게 느껴졌었다. 정말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 거라곤 언젠가 여름에 할머니와 아무도 없는 놀이터에 갔다가 갑자기 내리는 비를 피해 엄청나게 큰 잎을 우산 삼아 비가 그칠 때까지 있었던 것, 그리고 그 앞에 파란색 대문의 집이 있었다는 것뿐이었다. 그 당시의 할머니 댁 근처에는 놀이터가 없어 동네에서 조금 떨어진 곳까지 버스를 타고 갔었고, 한참 걷다 다리가 아파 할머니 등에 엎혀 돌아왔던 기억. 나중에 우리가족이 서울로 이사간 후에 할머니는 서울에서 우리가 온다고 하면 늦은 밤까지도 안 주무시고 기다리고 계셨고, 따뜻한 밥과 실고추가 올려진 구운 생선, 고소한 참깨가 뿌려진 꼬막 등의 반찬을 정성스레 차려주시곤 했다. 우리에게 많은 걸 묻거나 이야기하진 않으셨지만 헤어질 때에는 말없이 단단하지만 따뜻한 손으로 우리 손을 꼭 잡아주시곤 했다. 크면서는 할머니가 간혹 서울집에도 오셔서 며칠 머무르시기도 했고, 그럴 때마다 말없이 뭐든 해주고 싶어하고 우리의 이야기에 귀기울이며 손녀들의 삶을 궁금해하시는 할머니가 사실은 얼마나 따뜻하고 마음이 넓은 분인지 알 수 있었기 때문에 더이상은 어렵지 않았다. 할머니의 아들들과 딸들인 우리의 부모님들 또한 이제 모두 장성해 안정적인 삶을 살고 있었고, 손주인 우리들도 딱히 문제없이 그저 자기 진로에 고민이 많은 평범한 학생들이었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당시는 살아계셨던 할아버지가 간혹 몸이 불편하셨던 것 외에 우리 가족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보였다. 새해나 추석같은 명절에 다같이 모여 떡국을, 또는 송편을 만들어 먹고, 못다한 이야기로 밤도 새울 정도로 사이가 좋은 가족들이었다. 이대로 다같이 계속 영원히 행복할 것만 같았다. 


할머니가 치매라는 사실을 온 가족이 알게 된 것은 2010년 가을쯤이였다. 팔순을 앞두고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병원에서 더 검사를 해보자고 한 것이었다. 알츠하이머 초기 증세였고, 이미 진행이 되고 있었다. 온 가족의 분위기가 심각해졌다. 

"그렇게 정신이 맑으셨던 분이 언젠가부터 건망증이 심해지는 것 같더라고... 그때 알아챘어야 했는데.." 

결과가 나온 후 다같이 만난 자리에서 첫째고모가 침울하게 말했다. 

"의사가 하는 말이, 진행 속도를 최대한 늦추는 것밖엔 방법이 없대..." 아빠가 대답했다. 

"이제야 좀 잘 넉넉하게 모실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도대체 왜..." 

병원에서는 진행 속도를 늦추려면 할머니가 최대한 스트레스를 받지 않도록 해야한다고 했다. 가족들은 십시일반해 광주에 계신 할머니를 서울로 모셔와 가장 좋다는 병원과 의사들을 찾아다녔다. 너도나도 할머니를 모시겠다고 했다. 할머니를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다들 필사적이었다. 결국 타협한 끝에 병원 위치에 따라 가까운 집들에서 상황에 맞게 모시기로 했다. 

할머니가 우리 집에 머무르셨을 때는 거의 초반이었다. 처음엔 겉으로는 거의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곧 함께 살면서 했던 청소나 설거지를 몇 번이고 다시 한다든지, 밥을 먹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또 먹는다든지, 옷을 거꾸로 입는다든지하는 작은 것들을 눈치챌 수 있었다. 가장 많이 하셨던 행동은 집에 가야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저녁이면 30분마다 한번씩 가방을 현관에 가져다 놓고 이제 집에 가야지, 하시는 것이었다. "할머니, 여기 다음 주까지 같이 계실 거예요," 하고 말씀드리면, "아이구, 그러냐? 난 또 오늘 집에 가는 줄 알았지." 하고 대답하시곤 30분 뒤에 똑같이 하시는 것이었다. 아니 우리 어머니, 집에 꿀단지라도 숨겨놨나, 왜 그렇게 집에 가고 싶으셔? 하고 엄마가 물으면, 집에 가서 염소 밥도 주고, 무화과나무에 물도 줘야 한다고 대답했다. 우리 집 뒷산 언덕에 염소를 풀어놓고 키우는데, 저녁노을이 질 때면 뒷산에 올라가 염소들과 함께 마을 전체가 빨갛게 물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본다고. 시간이 더 지나면서는 가끔씩 우리 이름을 잊어버려서 부르지를 못하고, 그저 얘, 하고 부르셨다. 우리는 할머니가 스트레스를 받지 않게 하려고 할머니 몰래 제대로 되지 않은 청소나 설거지를 다시하고, 할머니 가방을 다시 방으로 옮겨놓곤 했다. 

서울에서 검사를 받고도 차도가 없었고, 집에 언제 가냐고 성화인 할머니를 결국 광주로 다시 모셨지만, 그동안 야속하게도 증세가 빨리 진행되어 더 이상은 정상적으로 생활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광주에 있는 요양원에 할머니를 모실 수 밖에 없었다. 첫날 할머니를 요양원에 데려다놓고 돌아와서 고모는 한참을 울었다고 했다. 

설상가상으로 동시에 할아버지도 병이 심해져 두 분 모두 요양원에 모실 수 밖에 없었다. 처음엔 두 분을 한 병실에 계셨는데, 나중에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할머니가 할아버지만 보면 공격적인 성향을 보인다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할아버지를 닮은 사람만 봐도 때리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격리할 수밖에 없겠다고 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사이가 그닥 좋지 않았던 것은 다들 알고 있었지만, 기억을 잃고 본능적이 된 상태의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그렇게 미워할 줄은 몰랐기 때문에 모두가 당황했다. 


장례식 때 알게 되었지만 할아버지에게는 다른 여자가 있었다고 했다. 듣자하니 본래 사랑하던 여자가 있었는데 어른들이 결혼을 반대해 어쩔 수 없이 할머니와 결혼을 했다고 했다. 그러나 그 여자를 잊지 못했고, 결국 두 집 살림을 하셨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할머니는 그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고 했다.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사랑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자기 남편이 두 집 살림을 하는게 반가울 여자가 어디 있을까. 할머니에게는 그야말로 자식들밖에 없었고, 자식들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평생 어머니에게 더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챙기려 했다고 했다. 그런데 장례식 둘째날 그 여자의 아들이 자신의 가족들과 함께 찾아왔다. 그는 슬픈 눈으로 우리 할머니가 병으로 일찍 돌아가신 자신의 어머니의 건강을 챙겼고, 심지어는 자신의 어머니 대신 자기 결혼식에 와주셨노라며, 자신에게도 어머니같은 분이었다고 했다. 모든 자식들은 묵묵히 함께 슬퍼했다. 자신의 남편과 외도한 여자를 챙기고, 심지어 그 아들의 결혼식을 간 할머니는 도대체 어떤 마음이었을까. 


요양원에 있으면서도 할머니는 짐을 풀지 않았고, 계속 집에 가야한다고 하면서 병실을 뛰쳐나가는 바람에 병원에서는 할머니를 묶어놓을 수 밖에 없었다며 해명을 했고, 그 모습을 본 고모는 노발대발하며 아빠에게 전화를 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가족들은 다시 할머니를 서울로 모셔오기로 했다. 

요양원 시설은 나쁘지 않아 보였다. 병원 앞에 넓은 뜰이 있었고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삼삼오오 모여 놀고 계셨다. 다시 만난 할머니는 아예 기억이 본인의 어릴 적으로 돌아가 소녀가 되어있었다. 산책 시간이 끝나고 요양사 분이 데리러 오자 들어가기 싫다며 도망을 가는데 어찌나 빠른지 요양사분이 헉헉거리며 쫓아가자 그게 재미있는지 깔깔거리며 웃었다. 할머니는 우리에게 뛰어오더니 아들들에게는 오빠들, 우리에게는 언니라 부르며 집에 갈때 자기 좀 데리고 가달라고 했다. 문득, 어쩌면 할머니가 그렇게 가야겠다고 했던 그 집은 우리가 아는 할머니 집이 아니라 할머니가 어렸을 적 살았던 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기억을 잃지 않았었다면, 어릴 적 살았던 집에 가보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나는 사진을 들고 거실로 다시 나가서 소파에 앉아있던 고모에게 물었다. 

"고모, 혹시 이 집이 어딘지 아세요?" 

"집? 음.... 글쎄, 이 집이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느낌이 방림동 아닌가 싶은데? 어디서 꺼낸 거야?"

"할머니 화장대 서랍에서요. 혹시 예전에 살던 집이 아니었을까요?"

"아마 방림동인 것 같은데 나도 잘 모르겠다. 근데 이런 파란색 대문은 흔하지 않으니까 동네 어른들한테 물어보면 알 것 같기도 한데?"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모두가 잠든 사이 집을 빠져나왔다. 사진 속 집에 찾아가 볼 생각이었다. 그 동네 근처라도 가서 주민들에게 파란색 대문 집을 아는지 물어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방림동에 도착해 이제는 떠오르지도 않는 어릴 적 기억을 더듬으며 길을 걸었다. 한참동안 주변을 걷다보니 아침에 나왔는데 벌써 점심 때가 지나있었다. 대부분 재개발이 되어 아파트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주택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혹시 그 집도 사라졌나..? 하며 사진을 들고 이리저리 둘러보는데 어떤 할아버지가 불렀다. 

"학생, 뭐 찾아?" 

혹시 아실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서 사진을 보여드리며 물었다. 

"저, 혹시 이 집이 어딘지 아세요?"

잘 보이지 않는지 눈을 찡그리며 사진을 보더니 할아버지는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잘 알지! 이 길로 쭉 걸어가서 왼쪽으로 가면 감나무가 밖으로 나와있는 집이 있어. 그 집 옆집이야!"

와, 이렇게 쉽게 한 번에? 나는 반신반의하며 신난 목소리로 감사합니다, 하고 외치며 뛰었다. 


감나무집을 지나니 파란색 대문이 보였다. 조금씩 가까워지자 심장이 뛰었다. 마침내 그 앞에 가자 사진 속 대문이 눈 앞에 나타났다. 오른쪽에 있는 우체통까지 같았다. 아니, 거의 비슷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그 집 뒤에는 산이 없었다. 할머니의 이야기에 따르면 뒷산이 있어야 했는데, 그 집은 동네 한복판에 있었다. 그럼 그렇지, 역시 한 번에 찾을 수 있을 리가 없지. 물론 할머니가 틀리게 말했을 수도 있지만, 왠지 이 집은 아닌 것 같았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갑자기 시야에 저 멀리 작은 산봉우리가 하나 보였다. 그 곳은 꽤 멀어보였지만, 나는 거의 본능적으로 저기가 내가 찾던 곳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지도 어플을 켜서 어떻게 가야할지 위치를 확인해보자 버스로 30분, 내려서 20분은 걸어가야 한다고 나왔다. 나는 일단 버스를 타기로 결정했다. 

한참을 걸어서인지 다리가 아팠고, 다행히도 버스에 좌석이 있어 앉았다. 오래된 버스라 그런지 내부가 심하게 덜덜거렸다. 어릴 때 할머니의 손을 잡고 버스를 탔던 기억이 났다. 어렸을 때 이후로 오랜 시간 잡아보지 못했던, 이제는 잡고 싶어도 잡을 수 없는, 늘 따뜻했던 할머니의 손. 


버스가 멈추고 내려서 걸었다. 겨울 바람은 매서웠고, 양손을 번갈아가며 주머니에 넣었다 뺐다 했지만 사진을 들고 다니던 손은 너무나도 시려웠다. 그래도 한참을 걸은 끝에 아직은 재개발이 되지 않은, 오래된 주택들이 가득한 동네에 도착했다. 하지만 동네에는 거의 사람이 다니질 않았다. 아마도 다들 이사를 간 모양이었다. 이 곳도 곧 있으면 재개발이 될 예정인 것 같았다. 더이상 사람이 다니지 않는 좁은 길에는 길고양이들이 왔다갔다 하며 먹을 것을 찾아 돌아다니고 있었다. 오래된 집들 사이로 헛헛한 바람만이 돌아다니며 윙윙 소리를 내고 있었다. 왠지 소름이 돋은 나는 어깨를 움츠리며 빠르게 대문들을 둘러보았다. 어떤 집들은 아직은 누군가 살고 있는듯한, 뭔지모를 인기척이 있었지만 사람은 보이지 않았고, 대부분의 집들은 비어있었다. 비슷한 집이 있으면 들어가서 빠르게 비교해 보고 나오기를 10번은 반복하며 한참 돌아다닌 끝에, 거의 언덕 아래에 있는 녹슬은 파란 대문의 집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사진과 똑같은 우체통에는 이전에 살았을 다른 사람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대문이 잠겨있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슬그머니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이 집도 역시 비어 있었다. 집 앞에 들어가니 무성한 무화과 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머리 속에서 본능이 바로 이 집이라고 외치고 있었다. 나는 거의 쓰러질 듯한 집을 한바퀴 돌고는, 집 뒤쪽에 나있는 오솔길을 따라 올라가 뒷산 언덕으로 올랐다. 비록 그 곳에 할머니가 말했던 염소는 없었지만, 작은 언덕이 있었다. 언덕에 앉아 바라보니 동네 전경이 내려다보였다. 나는 가지고 간 카메라로 사진을 찍었다. 마침 해가 지고 있었고, 계란 노른자처럼 저무는 해가 지평선에 걸쳐있었다. 마을이 점점 빨갛게 물들고 있었다. 


나는 오랫동안 언덕에 걸터앉아, 이제는 사람이 살지 않는 텅빈 동네를 내려다보며 할머니가 이 집에 와계신 모습을 상상했다. 한순간 매섭던 겨울바람조차 멈춘 듯 왠지 손이 따스해지면서 마치 할머니가 내 손을 잡고 곁에 앉아계신 것처럼 느껴졌다. 붉게 물든 하늘 아래 염소 모양의 구름이 노오란 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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