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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숨김 Nov 04. 2019

오후 3시

19 Juli @ 섬

화요일 3시.

자전거를 빌려 도서관으로 향했다. 페달을 밟기가 힘들 정도로 바람이 강하게 부는데도 춥지 않은 날씨는 오랜만이었다. 귓가를 스치는 바람결을 느끼면서 살짝 장딴지가 당길 정도로 페달을 밟았다. 날도 좋은데 간만에 자주 가던 서점에 들러볼까, 하다가 인터넷으로 사려고 봐놨던 책이 거기 있었던 게 생각이 났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서점 앞에 도착하니 문 앞에 10분만 기다려달라고 날려 쓴 메모가 붙어있었다. 어쩔 수 없이 자전거를 끌고 지나치려는 순간, 곱슬거리는 장발의 남자가 뒤에서 걸어오더니 문을 열며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어디서든 익숙한 책내음을 맡으며 둘러보니 새로운 책들이 많이 들어와있었다. 하지만 찾는 책은 없었다. 이왕 온 김에 이런 저런 다른 책들을 구경하고는 나와서 도서관까지 걸었다. 역시 특유의 책향기가 가득한 도서관에는 마치 나를 기다렸다는 듯 딱 한 자리가 비어있었다.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오직 내 옆 사람만이 엎드려 자고 있었다. 도서관 안의 공기는 시간이 멈춘 것처럼 나른했다. 책과 노트를 꺼내 펼치자 갑자기 구름 사이로 해가 났는지 강렬한 햇살이 창문을 통해 노트를 노랗게 물들였다. 손등이 뜨거워지면서 갑자기 더워졌다. 특히 옆 자리에는 더욱 강하게 직사광선이 내리쬐고 있었고, 나는 그 사람이 혹시라도 더워서 깰까 싶어 조심스럽게 블라인드를 내렸다. 


월요일 3시.
약속 장소에 급하게 도착해 자전거를 세우고, 후다닥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 점심 때가 지난 시간이라 그런지 손님이 없었다. 나를 알아본 친구들이 손을 흔들며 반갑게 인사를 하고, 같이 앉은 친구들을 소개시켜주었다. 같이 탄뎀(언어교환)을 한지 벌써 반 년 정도 된 친구 A와 L은 자유대에서 한국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이다. 둘은 이번 가을학기부터 한국에 교환학생을 가게 되어 매우 들떠있었다. 오늘은 종강을 하고 학교 친구들과 한국에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같이 밥을 먹는 자리였다. 시험이 끝나서 매우 신난 목소리로 빠르게 수다를 떠는 여섯명의 독일인과 혼자서 대화하려니 머리가 터질 것 같았지만 함께 이제 시작될 방학을 축하해주었다. 매운 음식을 잘 못 먹는 A는 한국에 가서 뭘 먹고 살아야 할지 엄청 걱정하면서도, 동시에 12시간이나 비행기를 타고 가야하는 첫 타지 생활이 기대되는지 한껏 부풀어있었다. 이미 온갖 한국 음식을 섭렵하고, 서울의 모든 로드샵을 다 들러보고 싶다는 L은 8월까지 한 달이나 남았는데 그 때까지 어떻게 기다리냐며 발을 동동 굴렀다. L은 덮밥을 젓가락으로 먹고 있었는데 매우 힘들어보였다. 왜 숟가락으로 먹지 않냐고 했더니 식당에서 숟가락을 따로 주지 않아서 원래 젓가락으로 먹는 건 줄 알았다고 했다. 우리는 깔깔거리며 한국에서 만나면 하고 싶은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외국인 친구들이 이해하고 있고 알고 싶은 한국에 대한 것들은 보통 꽤 전형적이어서 마치 영화 속 클리셰처럼 그 장면들이 떠오르는데 과연 그 이미지들이 이 친구들이 1년 동안 살아본 뒤에도 같은 느낌일지 궁금해졌다. 동시에 문득 내가 베를린에서 산지도 오늘로 벌써 1년 반이 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년 반 전의 나는 베를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수요일 3시. 

항상 지나치기만 하고 가보지는 못했던 곳에서 약속을 잡아 가보는 것을 좋아한다. 

까페 안에는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다. 과일을 가는 기계 소리와 커피를 내리는 머신 소리가 꽤 큰데도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지 화이트 노이즈처럼 들렸다. 정류장에 세우고 온 자전거가 잘 반납되었는지 어플을 확인하는데 친구 M이 도착했다. 남편과 함께 네팔에서 온 M은 나와 함께 독일어 스터디를 하는 그룹의 멤버이다. 항상 밝은 에너지와 쾌활한 모습의 그녀는 최근 겪고 있는 힘든 일들을 촉촉한 눈시울로 힘겹게 털어놓았다. 일자리를 구하기 힘들어 불안한 마음과 믿고 의지하는 남편이 아파서 잠깐 네팔에 다녀와야 하는 상황, 그리고 미처 기뻐하기도 전에 잃은 작은 생명까지. 얼마 전 다른 스터디 멤버가 임신 소식을 알렸을 때 마치 자기 일처럼 축하해 주던 그녀의 속이 사실은 얼마나 아팠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자기와 함께 있으면 더 힘들어질 거라며 차라리 다른 남자를 만나라는 얘기까지 했다는 남편의 얘길 전하며 그녀는, 그래도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단 한 사람을 어떻게 떠나겠냐고, 지금은 괜찮다며 아무일도 없었던 때처럼 웃어보였다. 애써 웃는 얼굴의 그녀 앞에서 오히려 눈물이 날 것 같아 말없이 손잡고 포옹해주는 것밖에는 달리 위로의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목요일 3시.

시험이 끝나기까지 10분이 남았다는 감독관의 담담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이제 소셜네트워크서비스의 데이터 보호에 대한 우리 나라의 상황과 결론만 쓰면 된다. 떨리는 손으로 떠오르는 문장들을 적었다. 결론 한 문장을 쓰자마자 펜을 내려놓으라는 말이 들렸다. 감독관의 목소리는 마치 지금 펜을 내려놓지 않으면 당장 쫓아가 뺏어버릴 것처럼 유난히도 엄격했는데, 그도 그럴것이 첫 시험인 읽기 시간부터 쫓겨난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바로 내 옆사람이었다. 읽기 시험 내내 그는 나를 흘긋거리더니 시험이 끝났는데도 답지에 마킹을 안해서 감독관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펜을 내려놓지 않아 결국은 감독관을 화나게 만들었다. 그러고도 굴하지 않고 감독관에게 시험지를 뺏겼는데도 답지를 뒤로 숨기고는 제발, 제발, 하는 것이었다. 그 절박한 심정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무릎까지 꿇는 사람은 처음 봤다. 모두가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결국은 시험장 밖으로 호출당하더니 그다음 시험부터는 들어오지 못했다. 아마도 이번 시험이 학교 지원에 제출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리라. 우리 시험장 말고 다른 방에서도 그런 사람이 있었다고 했다. 뭔가 시험 시간이 지연되는 것에 짜증이 나면서도 한편으로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밖으로 나오니 그런 마음이 무색하게 날씨가 너무 좋았다. 그 사람은 이렇게 맑은 하늘 아래서 어떤 심정으로 집에 돌아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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