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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숨김 Nov 04. 2019

Synergie(Synergy: 시너지)

09 Aug 2019 @섬

1.  

삐- 삐- 삐- 

알람이 울리고 창문의 커튼이 스르륵 젖혀지며 창 밖의 햇살이 미끄러지듯 들어온다.

부드러운 선율의 재즈 음악이 페이드인으로 켜지며 고요한 정적을 어루만지듯 녹아든다.

지훈은 눈을 비비며 어두운 방안을 천천히 채우는 햇빛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방 전체가 환해지고, 시야가 점점 밝아진다. 아침이다. 지훈은 침대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하이 구글, 오늘 날씨는 어때?" 침대 옆에 있던 동그란 스피커에 잠시 초록불이 켜지며 대답했다.

"2051년 8월 7일 월요일, 현재 시각 7시 5분. 오늘의 바깥 날씨는 영상 40도로 지난 주와 비슷한 온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밤에는 일교차가 심하니 겉옷을 챙기시는 것이 좋겠고..."

기상 시간에 맞추어 내려진 모닝 커피를 마시며 옷을 입고, 구글홈이 들려주는 뉴스를 들으며 갓구운 토스트에  삶은 계란, 치즈, 토마토, 햄을 올려 아침을 해결한다. 아, 여기에 아보카도가 있으면 진짜 환상의 조합인데. 하지만 아보카도는 인간의 이기심 아래 미친듯이 대량 생산되다가 약 5년 전에 멸종되어 지구상에서 사라져버렸다. 그 이후에는 개인적으로 아보카도를 키우던 사람들이 간간히 소량으로 판매를 하긴 했지만, 거의 부르는 게 값인데다 너무 비싸서 사먹을 엄두도 못낼 정도의 금액이었기 때문에 어느 순간부터는 구하는 것을 그냥 포기하고 그 맛을 떠올리지 않으려 애썼다. 

"지난 달부터 주말마다 계속되어왔던 로봇 고용 반대 시위가 이번 달부터는 평일 내내 지속될 예정입니다. 지난달 마지막까지 절대 로봇을 고용하지 않겠다던 세모기업마저 시스템을 자동화로 교체하며 로봇 고용을 시작하자 이에 분노한 실업자들이 노동조합에 합류하며 시위는 대규모로 점차 번질 예정입니다. 지속적인 실업률의 증가로 길거리에 나앉는 부랑자들 또한 증가하면서 시민들은 안전에 위협을 느끼고 있습니다. 주말부터 계속된 시위는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으며 따라서 교통상황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됩니다."

아나운서의 건조한 목소리 뒤로 분노한 군중들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오늘도 데모야, 또 길막히겠네. 헤이 구글, 다음 뉴스. " 지훈은 인상을 쓰며 말했다. 

"... 앞서 나왔던 모델 H-R에 뒤이어 휴먼S에서 새로이 개발한 인간형 로봇 H-S는 지금까지 나왔던 모델 중 가장 발전된 형태로, 인간의 모습과 가장 흡사하며 뛰어난 지능과 즉각적인 반응을 자랑합니다. 개발에 함께 참여했던 막스 플랑크 뇌과학 연구소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가장 오랜 기간 연구한 빅데이터를 활용하여 개발한 머신러닝 시스템을 적용해..."

"헤이 구글, 화면 좀 띄워봐."

라디오로 흘러나오던 뉴스가 영상을 송출하자, 허공에 떠오른 프레임에 남자와 여자의 모습이 비춰졌다. 그들의 모습은 만약 로봇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봤다면 거의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인간과 흡사했다. 

".....현존하는 로봇들 중 가장 높은 수준의 지능과 반응속도를 지니고 있고, 학습능력 또한 뛰어나 어떤 상황에서든 적절히 대응하며, 사람들과 어울리거나 심지어 함께 일하는 데에도 거의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던 지훈은 갑자기 출근할 시간이 되었다는 알람이 울리자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미처 뉴스를 끄지 못하고 후다닥 자켓을 챙겨 현관으로 나서는 그의 뒤로 나머지 뉴스가 들려왔다. 

"..고용노동부에서는 적절한 기업들을 선정하여 H-S를 보급해 실험해볼 수 있는 제도를 검토 중에 있으며,.." 


2. 

아슬아슬하게 회사에 도착한 지훈은 카드를 찍고 건물 안으로 허겁지겁 들어가 엘레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시위 때문에 길이 심각하게 막힌데다가 오늘따라 이상하게 주차가 힘들어 회사에서 좀 떨어진 곳에 겨우 자리를 찾아 주차를 하고 뛰어왔더니, 안 그래도 더운 날씨 탓에 콧등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숨을 고르고 있는데 옆에 누군가가 다가와 인사를 했다. 혜린이었다. 

"지훈 님, 뛰어오셨나봐요."

"아, 혜린 님! 시위 때문인지 이상하게 주차장이 꽉찼더라고요. 좋은 아침입니다."

좋은 아침이예요, 하고 갈색 단발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싱긋 웃는 혜린의 맑은 얼굴이 지훈의 마음을 울렸다. 그녀는 지훈과 함께 1년 째 같은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디자이너로, 6개월 전부터 같은 팀에서 몇몇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해오고 있었다. 혜린보다 2년 먼저 회사의 마케팅 팀에 입사한 지훈은 꽤 여러 팀의 사람들과 일을 진행해왔지만 지금까지 혜린만큼 일을 완벽하고 똑부러지게 해내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해외에서 오래 공부하고 왔다는 이유로 깍쟁이같을 거라는 회사 내의 수근거림을 대담한 디자인으로 단번에 잠재운 그녀는 일뿐만 아니라 인간관계에서도 때로는 강하게 리드하고, 때로는 따뜻한 배려로 팀원들을 격려하는 모습을 적절하게 발휘하는 현명한 인물이었다. 특히 지훈과 함께 일했던 첫 프로젝트가 국제 대회에서 큰 상을 수상한 것을 시작으로 해당 제품의 수익이 경쟁사를 제치고 연이어 고공행진하면서 두 사람은 그야말로 환상의 궁합으로 시너지를 발휘해왔다. 그런 이유 때문에 지훈 뿐만 아니라 그녀와 함께 일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지훈과 함께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의 기간들이 항상 절묘하게 맞아떨어져 팀으로 함께 일한지도 벌써 반년이 넘어가고 있었다. 지훈은 회사에서 이렇게 완벽한 호흡을 맞춰 일할 수 있다는 것에 늘 감사하며, 특히 그 사람이 혜린이라는 것에 더더욱 감사하고 있었다. 

게다가 둘은 여러모로 취향도 비슷했다. 혜린 역시 지훈과 마찬가지로 재즈를 즐겨 듣는데다가 주말에는 등산하는 것을 좋아했다. 심지어는 아보카도를 좋아했던 것까지도 비슷했는데, 그녀는 가끔씩 아보카도를 직접 재배해 키운다는 지인으로부터 전달받은 아보카도를 점심도시락과 함께 싸와서 지훈에게만 몰래 나누어주곤 했다. 둘은 음악 플레이리스트도 공유하고 있었는데, 즐겨듣는 음악이 무려 86%나 겹친다는 것에 서로 놀라기도 했다. 덕분에 그들은 일 외에도 이야깃거리가 끊이질 않았고, 이러한 공통점은 그들이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시너지를 내는 데에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으며, 동시에 지훈이 혜린에게 사적으로도 관심을 갖게 하기 충분했다. 하지만 혜린도 지훈과 같은 마음일지는 알 수없는 노릇이었기에, 지훈은 자신의 마음을 전달할지 말지를 망설이고 있었다. 어쩌면 이번 프로젝트를 하면서 조금 더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할 수 있을 뿐이었다. 

엘레베이터가 도착하고, 문이 열렸다. 또각또각, 그녀의 하이힐이 유리 바닥을 울리는 소리를 들으며 지훈은 숨을 들이쉬며 75층 버튼을 눌렀다. 향긋한 꽃내음이 코에 맴돌자, 그는 기분이 상쾌해졌다. 

"아참, 그러고 보니 아직 못 들으셨겠네요. 오늘 오전에 강당에서 기자회견이 있었대요. 그래서 아마 취재진들때문에 주차장이 꽉 찼을 거예요."

어쩐지 주차장에 평소에는 못보던 커다란 차량들이 많더라니. 지훈은 투덜거리고 싶은 마음을 숨기며 물었다.

"무슨 기자회견이요? 새로운 뉴스가 있나보죠?"

"그건 저도 정확히는 모르겠어요. 한번 올라가서 상황을 봐야죠, 뭐"

엘레베이터는 순식간에 75층에 도착했다. 문이 열리고, 먼저 발걸음을 떼어 사무실로 걸어가는 혜린의 뒷모습을 보며 잠시 멍해져있던 지훈은 정신을 차리고 자리로 향했다. 


3. 

자리로 간 지훈은 자기도 모르게 입을 딱 벌렸다. 아침에 뉴스에서 봤던 로봇 여자가 눈 앞에 앉아있다. 아니, 정확히는 그의 옆자리에 앉아있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지훈은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어버버거리며 옆 팀의 정수에게 물었다.

"저, 정수님, 혹시 저거 로봇 아니예요? 이게 어떻게 된 거죠?" 

심드렁한 표정으로 키보드를 두들기던 정수가 대답했다.

"아침 뉴스 보셨나보네요. 네, 맞아요. 오늘 기자회견에서 발표했는데, 우리 회사가 고용노동부에서 선정한 기업에 선정이 되서 앞으로 로봇이랑 같이 일하게 됐다나 뭐라나. 그나저나 지훈님 당분간 적응하느라 힘들겠어요, 보니까 지훈님 팀으로 투입되는 것 같던데."

이게 무슨 청천벽력같은 소리인가. 설마 아니겠지. 지훈은 불안한 마음을 감추고 최 부장의 사무실로 향했다. 

그리고 약 20분 후 최 부장의 사무실에서 자리로 돌아온 지훈의 눈동자는 한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최부장에게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정부에서 새로 개발한 인간형 로봇을 실험해볼 기업 중 하나로 지훈의 회사가 선정되었고, 임원회의에서 한참 논의 끝에 현재 회사 내에서 가장 성과를 올리고 있는 지훈의 팀에 배정한 것이었다. 실험을 위해 정부에서 지급되는 예산이 그야말로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뿐만 아니라 이 일을 잘 해내고 나면 해외의 연구소들과도 연결되어 회사의 가치와 수익 또한 올라갈 것이 분명했다. 이것은 회사뿐만 아니라 지훈에게도 개인적인 커리어로 봤을 때 좋은 경험이 될 터였다. 하지만 지훈이 상심한 이유는 사실 다른 것이었다. 바로 지금까지 혜린과 함께 했던 프로젝트를 그 로봇과 해야한다는 것이었다. 

"아니, 새로운 프로젝트도 아니고, 지금까지 잘 진행해오던 프로젝트를 왜 다른 사람이랑 진행해야하는 거죠? 그것도 사람도 아닌 로봇이랑?"

거의 소리지르기 직전의 목소리로 지훈이 최부장에게 따졌다. 최부장은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자네도 알다시피 그 프로젝트는 지금 거의 성공 직전이잖나. 생각해 봐, 회사 입장에서도 이 로봇 때문에 손해를 보고 싶진 않다고. 새로운 프로젝트에 처음부터 집어 넣어서 예측불가능한 상황을 만드는 것보다는 거의 다 진행되서 로봇이 뭘 하든 상관없이 성공할 것 같은 프로젝트에 대충 끼워넣는 게 낫지 않겠어? 게다가 이 지원금이라는 게 엄청나다고. 아마 잘 진행하고 나면 자네한테도 보상이 크게 돌아갈거야. 자네 연봉협상도 얼마 안 남았잖아, 이 기회에 승진얘기도 꺼내볼 수 있지 않겠어? 그러니까 그냥 잘 맞춰주고 할 수 있을 것 같은 거 던져줘서 대충 일 시켜서 끝내. 어차피 프로젝트 엔딩도 얼마 안 남았잖아. 자네라면 잘 할 거야, 그리 믿겠네."

지훈은 말문이 막혀 더이상 말을 잇지 못하다 뒷목을 부여잡고는 뒤돌아섰다. 최부장은 그런 지훈의 뒷모습을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생각에 잠겨있다가 한숨을 쉬던 지훈에게 메세지가 왔다. 혜린이었다.

'갑자기 팀이 교체되어서 같이 하던 프로젝트를 함께 마무리 못하는 것이 아쉽긴 하지만, 지훈님이라면 제 몫까지 잘 마무리하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혹시라도 중간에 도움 필요하시면 언제든 얘기하시고, 잘 끝내고 나면 우리 조만간 술 한 잔해요.(웃음)"

혜린의 메세지를 보자 더욱 한숨이 나왔지만, 마지막 부분을 읽자 지훈의 입가에 슬쩍 웃음이 지어졌다. 

그래, 이것만 잘 끝내고 나면 혜린과 술 한잔할 기회가 생긴다. 그동안 다른 팀원들과의 술자리에서 늘 일찍 귀가하던 혜린이 왠일로 이런 메세지를 보낸 것인지 의아하긴 했지만, 단둘이 술이라니! 이것은 필시 기회다. 

나름의 안도감을 느끼며 지훈은 잠시 망설이다 옆자리의 그녀, 아니 로봇에게 말을 걸었다. 

"저, 안녕하세요. 저는 김지훈이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잠자코 앉아있던 그녀, 아니 로봇도 고개를 돌리며 슬쩍 인사를 했다. 왠지 수줍어 보이는 표정이었다. 

"저는 혜성이라고 합니다. 갑자기 투입되서 모르는 게 많지만 잘 가르쳐주세요."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사람같은 반응에 지훈은 속으로 조금 놀랐지만 이내 침착하게 대답했다.

"네, 그럼 메일로 업무사항 전달할테니 읽어보고 이번 주 내에 파악해주세요. 모르는 거 있으면 물어보고요."

잠시 그녀의 눈이 푸른빛으로 빛나더니, 이내 옅은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더 인간같은데. 일도 정말 잘 할지도? 작은 기대감을 품고 지훈은 이메일의 전송버튼을 눌렀다.


4. 

"헤이, 지훈아, 여기! 오랜만이다."

멀리서 반갑게 손을 휘두르는 지수가 보이자, 지훈은 달려가 포옹을 했다.

"야, 진짜 오랜만이다. 한국에 얼마만에 들어온거야? 잘 지냈어? 그동안 별일없었지?"

"어 그럼, 이번에 연구소 옮긴 거 말고는 별일없지. 넌 여전히 워커홀릭이고?"    

"회사생활이 다 똑같지 뭐. 연구소를 옮겼다고?"

오랜만에 만난 둘은 함께 한식집에서 저녁을 먹고 못다한 서로의 근황을 나누었다.  

지수는 지훈의 대학 동아리 친구로 로봇공학을 전공한 후 미국으로 건너가 박사과정을 밟으며 연구소를 다니고 있었다. 최근 독일의 막스 플랑크 연구소로 옮겨 뇌과학연구소에서 근무하게 된 그는 출장 겸 한국에 방문하게 되었고, 늘 그랬듯 오랜 친구인 지훈에게 연락해 만난 것이었다. 서로의 근황을 어느정도 나눈 후 이야기 거리가 슬슬 줄어들 때쯤 그들은 자리를 옮겨 근처의 한적한 바로 이동했다. 그들은 빠듯했던 대학 시절 특별한 날에만 마셨던 잭다니엘을 주문해 얼음을 넣고 홀짝거리며 마셨다.

"우리 대학교 때 생각난다, 처음 잭다니엘 마셨던 날 지훈이 너 엄청 취했던 거. 기억나?"

"당연히 기억나지, 그날 나 효림선배한테 고백했다가 차였었잖아. 미안하다길래 다른 사람 있는 줄 알았더니 졸업할 때까지 아무도 안 사귀고. 분명 비밀연애하고 다닐 거라면서 사람들이 수군거리긴 했지만.."

"맞아, 그랬었지. 얼마 전에 우연히 들었는데 그 선배 직장 그만뒀다던데? 대기업 다니면서 최연소 승진하고 한참 잘 나가는 것 같더니 말야. 그즈음에 미국에서 오퍼받았다더니 거기로 간건지, 갑자기 그만두고 사라져서는 아무랑도 연락이 안된대. 효림선배랑 제일 친하던 지혜 있잖아, 걔랑은 계속 연락하고 지냈는데 어느 순간 끊겼다고 하더라고. SNS도 없애고, 무슨 완전히 증발한 것처럼 말이야. 연락 안 되서 걱정도 되고 좀 서운해하는 것 같더라."

"그랬구나, 나는 전혀 몰랐네."

뭐, 어디선가 잘 지내고 있겠지, 하며 지훈이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자 지수는 화제를 돌렸다.

"요새는 만나는 사람없어? 바빠서 연애할 시간도 없으려나?"

연애는 무슨... 지훈이 말꼬리를 흐리며 대답하자 빈틈을 눈치챈 지수가 물었다.

"누가 있긴 있구나? 회사 사람이야?"

말을 잠시 멈춘 지훈은 대답을 하지 않다가 이내 집요하게 묻는 지수에게 자포자기한 듯 살짝 얼굴을 붉히며 혜린에 대해 털어놓았다. 같은 회사 동료이고, 여러모로 관심사도 비슷하고 일하는 합도 잘 맞는데다, 자신의 회사 생활에 있어 그녀가 얼마나 큰 활력소가 되는지. 하지만 회사동료라 자칫 잘못했다가 관계가 틀어질까봐 마음을 드러내지는 못하겠고, 어쩌면 그녀는 자신을 그냥 좋은 회사 동료로만 생각할지도 모른다고. 

"그 여자도 너가 맘에 드는 거 아냐? 이번 프로젝트가 끝나면 같이 술 한잔하자고 먼저 얘기했다며?"

반색을 하는 지수에게 지훈은 대답했다.

"그건 모르는 거지, 나한테만 그런 게 아닐 수도 있고. 아, 이번 프로젝트하면서 많이 친해져서 계속 같이 했으면 더 자연스럽게 친해질 수 있었을텐데! 하필 그 로봇 때문에!..."

잠자코 지훈이 늘어놓는 푸념을 듣고 있던 지수가 이건 비밀인데, 하고 조용히 목소리를 줄였다. 

"혹시 도움이 될까 싶어서 얘기하자면, 사실은 내가 최근에 옮긴 연구소에서 진행되고 있는 게 바로 그 인간형 로봇 H-S 관련된 프로젝트야. 그것 때문에 잠깐 한국에 출장 온 거기도 하고. 투입된지 얼마 안되서 아직 세부적인 프로세스를 전부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이 H-S 모델은 최신형이라 시스템은 지금까지 나왔던 그 어떤 모델보다도 우수하지만 아직 출시된 지 얼마 안되서 반응 속도가 조금 느린 것이 흠이야. 아직 자체적으로 주변환경에 대한 데이터를 쌓아야 하거든. 그래서 출시 초기부터 기업에 뿌린 거지. 처음엔 아마 너가 좀 머리가 아플지도 몰라. 하지만 환경에 적응하면서 데이터를 어느정도 모으고 나면 그때부터는 엄청 빠른 속도로 업무를 익힐 거니까 너무 걱정하진 마. 시간이 좀 필요할 뿐이니까."

"아, 그래서 이렇게 갑자기 오게 된 거구나? 이번 모델이 너가 그 연구에 투입된 후에 벌써 3번째 출시된 건가? 기술이 점점 우리가 예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빠르게 발전하는 것 같아. 가까이서 보니까 진짜 사람같더라고. 심지어 이름도 완전 사람이름이고 말야. 참, 그러고 보니까 로봇 이름은 어떻게 정해지는 거야? 회사 내부에 로봇철학관이라도 있나?"

"아니, 그냥 모델명을 이니셜로 해서 정해져. 이번엔 H-S니까 아마 현수, 희선, 이런 이름일껄?"

"그러고보니 그 로봇 이름은 혜성이네. 그렇게 정해지는 거였구나."

"응, 그 전에 H-R모델은 하람, 효리 이런 식이었거든. H-R모델도 정말 우수한 모델이었다는데, 나는 실제로 본 적은 없어. 업무 파악하면서 찾아보니까 H-R모델은 몇 개 양산 안된 모양이더라고, 비밀리에 연구 진행 중이라던데 이미 어딘가 투입이 되긴 했겠지? 2-3년마다 하나씩 출시되니까 아마 지금쯤이면 데이터가 많이 쌓여서 거의 사람같을걸." 

"아무리 사람같아봤자 로봇이 로봇이지 뭐, 그게 사람이겠어? 오늘도 얘기하는데 답답해서 원, 앞으로 같이 얘기나 제대로 나눌 수 있을까 싶더라. 무슨 일을 같이 한다고... 휴." 

"처음엔 좀 답답해도 조금만 잘 버텨봐, 점점 반응속도도 빨라질거야."

"그래... 이 프로젝트만 끝나면 나도 크게 보상받을 수 있을거라니까 그것만 생각하고 열심히 해봐야지."

지훈은 앞으로 혜성을 대할 때마다 인내심을 가지고 잘 대해줘야겠다고 다짐했다. 


5. 

"김지훈 팀장, 지금 연차가 얼만데 이런 초보적인 실수를 할 수가 있는 건가? 도대체 생각이 있는거야, 없는거야? 그 고객이 우리 회사에 얼마나 중요한 투자자인지 몰라? 이번 건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면 보상이고 뭐고 시말서 쓸 각오해! 알았어?" 

어두운 표정으로 최부장의 고함을 듣던 지훈은 입술을 꽉 깨물고는 죄송하다는 말도 차마 못하고 고개만 꾸벅이고 부장실을 나섰다. 사무실 전체에 울려퍼진 최부장의 목소리로 인해 모두의 분위기가 굳어있었다. 단 한 사람, 아니 로봇, 바로 혜성을 제외하고 말이다. 그녀의 표정에는 데이터가 입력되었다는 의미의 초록색으로 빛나는 눈빛 빼고는 별 변화가 없었는데, 심지어 이 문제가 바로 그녀 때문에 터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도무지 읽히지 않는 애매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지훈이 그전날에 한 다짐이 무색하게 혜성은 실수가 잦았다. 마치 지훈의 인내심이 바닥나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그녀는 계속해서 자질구레한 것들을 놓쳤고 지훈은 혜성에게 시킨 모든 것을 매번 다시 확인해야만 했다. 인내심과 동시에 스트레스가 극에 달할 때쯤, 중요한 고객과의 프로젝트 미팅 날짜를 조율하는 과정에서 혜성이 전체 캘린더에 날짜를 잘못 입력하는 바람에 고객은 무려 한 시간도 넘게 기다리다가 가버렸고, 지훈은 그것을 다음날에야 알았던 것이었다. 다시 연락해 날을 잡으려고 하니 그 고객은 이번 일정의 날짜를 맞춰 출장온 거라 다시 돌아가야하는 데다 이미 기분이 상해 그닥 협조적이지가 않았다. 지훈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방법을 고민하는 동안, 혜성은 무표정으로 앉아 다른 일들을 했다. 간혹 눈에서 초록빛이 반짝반짝거렸다. 무표정하다 못해 평화로워 보이는 혜성을 보며 지훈은 너무 화가 났지만, 화를 낸다고 해결되는 것은 없었다. 답답한 마음을 안고 옥상에 있는 휴게실로 올라갔다. 잠시라도 숨을 돌려야 할 것 같았다. 너무나도 복잡한 머리 속 때문에 그는 그의 뒤로 누군가가 따라올라오고 있다는 것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옥상에 올라온 지훈은 한숨을 크게 쉬었다.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요? 건물 내려앉겠어요." 

화들짝 놀란 지훈은 뒤를 돌아보았다. 혜린이었다. 

"지금 심정으로는 차라리 그냥 내려앉아버렸으면 좋겠네요." 지훈은 고개를 숙이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얘기 전해 들었어요. 답답하겠지만 그래도 지금은 문제를 해결하는 게 중요하잖아요? 내가 좀 도와줄까요?"

지훈은 고개를 들어 혜린을 바라보았다. 혜린은 늘 그렇듯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도 예전에 그 고객이랑 프로젝트 미팅을 한 적이 있어서 알고 있거든요. 그분이 굉장히 애지중지하는 외동딸이 있는데, 어쩌다 전해들으니 그 따님이 갑자기 아파서 응급실에 입원하는 바람에 원래 출국하려던 날짜를 일주일 정도 미뤘다고 하더라고요. 거기 병문안이라도 한번 가서 죄송하다고 하고 다시 미팅 날짜 조율해보는 건 어때요? 마침 제가 아껴둔 아보카도가 몇 개 있는데, 외동딸이 아보카도를 그렇게 좋아한다고 하니 저랑 같이 가보는 걸로 해요." 

그녀의 뒤로 왠지 후광이 빛나는 것만 같았다. 진정한 구세주다, 라고 지훈은 생각했다. 

"와, 혜린님은 도대체 그런 정보를 어떻게 아셨어요?? 게다가 같이 가주신다니 이렇게까지 도와주시고... 정말 고마워요."

"뭘요, 저도 어쩌다 들은 거예요. 그리고 원래 제가 하던 일이잖아요, 마무리가 잘 되면 저도 좋죠."

혜린은 잠시 말을 멈추고는, 얼굴을 살짝 붉히며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이번 일이 잘 되야 지훈 님이랑 기분 좋게 한 잔 할 수 있지 않겠어요?"

왠지 부끄러워하는 혜린을 보고 지훈은 자신도 덩달아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 그렇죠! 혜린님 덕분에 마무리 잘 될 수 있을 것 같네요! 아, 역시 로봇이랑 일하는 건 정말 아니었던 것 같아요. 혜린님이랑 같이 끝까지 했어야 했는데! 이번 프로젝트만 끝나면 보상이고 뭐고 다시는 절대 로봇이랑 같이 일하지 않겠다고 부장님한테 말씀드려야겠어요. 앞으로는 혜린님하고만 같이....."

아차, 하고 자신도 모르게 말을 멈춘 지훈은 붉어진 얼굴로 혜린을 바라보았다. 

"저도 지훈님하고 일할 때가 제일 좋았어요. 우리 얼른 끝내고 다음 프로젝트 얘기하기로 해요! 그럼 이제 내려가볼까요?"

혜린은 씩 웃으며 지훈의 말을 이어받았다. 

지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둘은 다시 사무실로 내려가는 계단으로 향했다. 

혜린도 자신과 같은 마음이라는 생각에 너무나도 신이 난 나머지, 지훈은 그를 뒤따라 내려오던 그녀의 눈에서 나온 푸른 빛이 벽에 반사되어 매우 짧은 순간동안 빠르게 반짝이는 것을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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