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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숨김 Nov 04. 2019

사랑을 했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었다

20 Sep 2019 @섬

1.

2월의 도시는 춥고 어두웠다. 한창 밝을 오후 3시였지만 길거리에는 이미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고, 온몸을 꽁꽁 싸맨 사람들이 제각기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바깥을 내다보던 K는 시끄럽게 울리는 윗층의 음악소리에 이마를 찡그리며 시계를 보았다. 시계는 오후 2시 21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2시 21분... 문득 머리를 스치는 P의 기억에 K는 괜시리 씁쓸해졌다. 모든 걸 지우고 다 잊었다고 생각했지만 아직도 여전히 가끔씩 떠오르는, 지금은 지나가버린 마음과 그 순간들. 


2.

K가 P를 처음 본 것은 슬슬 봄향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한 3월의 주말 저녁, 어느 전시 오프닝에서였다. 지인이 주최한 전시였지만 아는 사람이 그 사람밖에 없는 다소 애매한 자리였기 때문에 갈까 말까 망설이다, 이내 일주일간 집밖에 나간 적이 없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으며 그래 이런 일이 있을 때라도 밖에 나가자, 하며 집을 나서 왔던 곳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 인사를 나누는 가운데 엉거주춤하게 서서 주변을 둘러보며 K는 역시 그냥 집에 있을 걸 괜히 왔다고 생각했다. 유일하게 아는 지인은 사람들을 맞이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그리 크지 않은 전시장 안이 서서히 가득차고 있었다. K는 천천히 시선을 옮겨 누구와도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전시장 안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떠들썩한 사람들 가운데 자신처럼 한 구석에 조용히 어색하게 앉아있는 한 남자에게 눈길이 닿았다. 조명이 닿지 않아 어둑한 공간에 우두커니 앉아있던 그 사람은 어딘가 모르게 쓸쓸한 눈빛을 보이고 있었고, 짙은 그 얼굴이 점점 분위기가 고조되는 전시장과는 매우 대조적이어서 K는 왠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물끄러미 자신을 향한 누군가의 시선을 느꼈는지 그가 K의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고, 둘의 눈이 마주쳤다.

잠시 멍해져 있던 K가 흠칫 놀라며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전시장 안을 가득 채우던 음악과 울긋불긋하던 조명이 꺼지고, 어느 한쪽 구석이 밝아지면서 K의 지인이 마이크를 들었다. 지인은 사회자로서 능숙하게 전시에 함께 참여한 사람들을 호명해 앞으로 불러냈고, K는 그 가운데에서 눈이 마주쳤던 그 남자, P를 발견했다. 유럽에서 온 P는 전시에 참여하는 건축가로서 함께 작업한 다른 건축가와의 작품에 대해 설명하며 밝게 웃었다. 아까의 쓸쓸한 표정은 온데간데 없었고, K는 그 모습이 왠지 낯설게 느껴졌다.

사람들의 발표가 끝나고 다시 자유로운 분위기가 되자, K는 집에 그만 가야겠다는 생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앗, 벌써 가는거야?" 드디어 사람들과의 인사를 마친 지인 H가 다가왔다.

"응, 초대해줘서 고마워. 덕분에 잘 봤어. 차 끊기기 전에 가보려고."

"차 끊기려면 멀었는데? 아직 10시도 안됐어. 좀 더 있다가 가."

그래도 집에 가겠다는 의사를 어떻게 전할지 잠시 고민하는 순간, 다른 사람이 H에게 인사를 했고, H는 잠깐만, 이라는 말과 함께 다시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K의 눈길이 그런 K를 바라보고 있던 P와 마주쳤다. 이번에는 피하기가 어려워 K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P 역시 옅은 미소를 보내더니, K에게 다가왔다.

"주최자 역할은 정말 쉽지 않은 것 같아요, H씨의 지인이세요?"

"네, 그러게요. 초대받아서 오긴 했는데 너무 바쁘네요."

"괜찮으시면 제가 대신 안내 좀 해드릴까요?"

P의 짙은 눈을 마주보게 되자 K는 왠지 가슴이 뛰었다. 둘은 서로 통성명을 한 뒤 전시장을 돌며 작품들을 구경했다. 함께 참여한 전시였기 때문인지 P는 다른 작업들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고, 자신이 아는 한도 내에서 열심히 설명해주려는 모습이 열정적이어서 K도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그의 설명을 집중해 들었다. 그동안 서서히 손님들도 사라지고, 밤이 깊었다. K는 이제 집에 가야겠다고 하며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설명해줘서 고마웠어요, 아는 사람도 없어서 조금 민망했는데 덕분에 전시도 잘 보고.. 감사합니다."

"이제 아는 사람 생겼네요 뭘. 저.. 괜찮다면 우리 SNS 친구할래요? 연락하고 싶은데, 제가 한국연락처는 따로 없어서요."

"음,... 저는 SNS를 안하는데요." K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설치하면 되죠! 제가 해 드릴까요?"

P의 제안에 잠시 망설이던 K는 고개를 끄덕였다. P가 씩 웃고는 손을 내밀자 K는 자신의 핸드폰을 내밀었다. 

그의 손가락이 천천히 움직여 화면을 누르고, K의 핸드폰을 다시 돌려준 그는 말했다.

"그럼 또 연락해요!"


3.  

P는 SNS를 통해 정말로 연락을 해왔다. 자연스럽게 안부를 묻는 것으로 시작해서 잘자라는 인사까지 둘은 거의 매일 메세지를 주고 받았다. SNS도 처음 해보는 것인데다, 이런 식의 만남이 익숙하지 않은 K는 P의 연락이 처음에 다소 어색하게 느껴졌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그녀의 일상을 점점 즐겁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쓸쓸해보였던 첫인상과는 달리 P는 꽤 유쾌한 사람이었고, 그의 위트넘치는 유머는 K에게 활기를 주었다. 전시가 끝나고 4월이 되자 P는 유럽으로 돌아갔고, 그동안 몇 번의 짧은 만남을 거치며 둘은 꽤 친해졌기에 헤어짐이 못내 아쉬웠다. P는 반드시 다시 오겠노라며 약속하고는 떠났다.

한편 K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허전한 마음에 스스로 놀라고 있었다. 금사빠라든지, 첫눈에 반한다든지 하는 말을 평소에 전혀 믿지 않던 K는 전혀 모르던 사이의 누군가와 이렇게 빠르게 가까워진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내심 지금의 상황이 다행스럽게 느껴졌는데, 다소 붕떠있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현재 상황을 조금 객관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어떤 것에 온전히 마음을 빼앗겨버리거나 홀라당 빠져드는 맹목적인 마음을 경계하는 그녀로서는 충분한 거리와 시간이 필요했고, 그렇기 때문에 P가 떠난다고 해도 괜찮을 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는 한동안 연락이 없었고, 붕떴던 마음또한 생각처럼 쉽게 가라앉지 않아 K의 정신을 혼란스럽게 했다. 그의 공기가 사라진 공허함에 잠시나마 신났었던 입가의 웃음기가 점차 가라앉고 있을 때쯤, 그는 다시 연락이 왔다.

"안녕, 잘 지내고 있어? 다시 돌아와서 일하느라 정신이 없었네. 미안해!"

이전과 같은 P의 메세지에 K는 큰 안도감이 드는 것을 느꼈다.


4.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다. 빨갛고 노랗던 잎들이 갈색으로 변해 길가에 우수수 쌓였고, 서늘한 바람이 어깨를 살짝 움츠리게 만들었다. P는 다시 오겠다던 약속을 지키겠다며 10월에 출장을 잡아왔다. 매일 사진 또는 영상으로만 보던 그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K는 마음이 설레었다. 일주일은 생각보다 매우 빠르게 지나갔고, 마지막 날 저녁 비행기로 떠나는 그를 위해 둘은 오전에 만나 브런치를 함께 했다. 매일같이 연락했어도 이렇게 부족할 수가 있다니, 그저 아쉬울 따름이었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그 다음엔 언제 어디서 만날 수 있을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크리스마스 때 뭐할 거야?" P가 들고 있던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글쎄, 아직 딱히 일정은 없는데. 넌 뭐할 건데?" 커피를 홀짝이며 K가 되물었다.

P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특유의 짙은 눈빛으로 K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번에는 네가 유럽으로 오는 건 어때? 크리스마스 때의 유럽은 온통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리는데 엄청 예뻐, 그때는 다들 쉬니까 휴가도 길테고, 근교로 같이 여행갈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내가 안내할게!"

K는 말없이 조용히 미소지으며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아직 유럽에는 한번도 가보지 않았던 그녀로서는 당장 쉽게 내릴 수 없는 결정이었기 때문에 섣불리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에게 지키지 못할 약속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게 그녀만의 대답하는 방식이었다.

P가 다시 유럽으로 돌아간 후 K는 비행기 티켓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크리스마스 티켓은 매우 비쌌지만, 가격은 그녀의 결심을 바꿀 수 있는 요인은 아니었다. 고민 끝에 마침내 티켓을 끊고 P에게 메세지를 보냈다. 그는 아직 대답이 없었다. 

K는 침대에 누워 이것이 과연 잘한 선택인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한번도 가보지 않은 도시인데다 아는 사람도 없는 곳이었으므로 간다면 정말 그를 만나러 가는 것이었다. 그가 사는 도시에서 함께 여행하고, 크리스마스 마켓을 구경하며 돌아다니는 상상을 하다가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핸드폰을 확인하자 그의 문자가 와있었다. 그는 매우 기뻐하는 것처럼 보였다. 신이 난 말투로 함께 가고 싶은 곳과 하고 싶은 것들을 잔뜩 나열하자 K의 기분 역시 들떴다. 굼벵이처럼 느린 11월이 지나가고 12월이 되자 K는 더욱 설레기 시작했다. 떠나기 20일 전부터 K는 캐리어를 꺼내놓고 가져갈 물건을 넣었다가 뺐다를 반복했다. P에게 줄 선물도 고심해서 골랐다. 자개가 새겨진 명함지갑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크리스마스까지 10일도 채 남지 않은 날 터졌다.
상사의 급한 호출로 불려간 K는 어두운 얼굴로 사무실을 나섰다. 내년 상반기에 있을 미술관 오픈을 위한 프레젠테이션을 연말까지 끝내야한다는 것이었다. 본래 다른 담당자가 진행하고 있던 일이었으나 그 사람이 갑작스런 집안일로 휴직하면서 K에게 넘어온 것이었다. K는 어쩔 수 없이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일때문에 크리스마스때 가지못하게 되었다고, 여행을 취소할 수밖에 없겠다고 말하는 상상만으로도 P가 얼마나 실망스러워할지 눈에 선했다. 그리고 막상 실제로 얘기를 했을 때 그는 그녀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 크게 실망한 듯했다. 어쩔수 없지, 라고 하며 비록 일때문에 쉬지 못하는 한국 정서를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럴 수 밖에 없는 K의 입장을 애써 이해하려 노력하는 그의 모습에 속상했다. 크리스마스 이브와 당일을 제외한 모든 날 일을 해야한다는 사실보다 더 슬펐다. 그렇게 연말이 순식간에 지나갔고, P는 왠지 더이상 이전처럼 연락이 오지 않았다. 한해를 잘 마무리하길 바란다는 K의 메세지도 한참 후에야 읽은 것을 뒤늦게 확인할 수 있었다.

넘치는 일때문에 정신없이 바쁘면서도 무기력한 연초를 보내는 K의 눈은 그야말로 텅 비어있었다. 너무나도 정신적인 여유가 없었다. 그녀는 휴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태였다. P와의 연락은 그야말로 간간히 이어지고 있었지만 이전만큼 활발하진 않았다. 이대로 시작도 못하고 끝나버리는 건가. 이렇게 될 수도 있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는데. 입술을 깨물며 K는 창 밖 너머 저멀리 날아가고 있는 비행기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다음날 아침 K는 회사에 출근해 휴직했던 담당자가 돌아와 있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연 중반까지 휴직 예정이었던 그녀는 예상보다 일이 빨리 해결되었다며, 그동안 고생많았죠? 하고는 K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담당자가 돌아온 이상 자신은 1월 말까지만 이 일을 맡고 넘기면 되는 것이다. 자리로 돌아온 그녀는 후다닥 2월의 비행기 티켓을 알아보곤 결제를 눌렀다. 집에 두 달째 그대로 있는 짐만 잘 확인하면 될 터였다. 다시금 두근거리는 마음을 억누르며 K는 P에게 메세지를 보냈다.

5.
“네가 여기에 있다니 믿기지가 않네, 정말 꿈만 같아.”
처음 만난 날부터 P는 지금까지 본 중 가장 즐거워보였고, 그런 그를 지켜보는 K는 흐뭇했다. 그는 그동안 보여주고 싶었던 곳이 얼마나 많은 줄 아냐며 쉴새없이 쫑알거렸고 K의 손을 잡고는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의 구석구석을 보여주었다. K가 와 있는 동안 휴가를 냈다는 P는 한국에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 아니냐며 부럽지? 하고 코를 찡긋거렸다. 확실히 한국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지, 하고 K는 대답했다. 도시 전경을 내려다볼 수 있는 시내의 가장 높은 탑, 로컬만이 아는 진이 다양한 단골 이탈리아 레스토랑, 자주 가는 근교의 공원, 그리고 비록 얼어붙어 있지만 그래도 아름다운 호수에 가서 근처를 거닐었다. 따사로운 햇살 아래 쌓여있는 눈들이 빛을 반사해내며 더욱 하얗게 보였고, 둘은 벤치에 잠시 앉아 햇살을 만끽했다. 겨울이지만 햇살덕분인지 따뜻한 그의 어깨덕분인지 추위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벤치 옆에 있는 오래되어 낡아보이는 시계가 2시 21분을 향해 멈춰있는 걸 보며 K는 시간이 지금 이대로 멈춰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야속하게도 시간은 계속 흘렀다. 한국에 돌아온 이후 P와의 연락은 이전처럼 지속되고 있었고 K는 다시 만나게 될 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P는 점점 더 적극적으로 연락을 해왔고 K는 그의 메세지를 보며 행복해했다.
너무나도 평소와 다름이 없던 화요일 오후, 나른해진 K는 SNS를 켰다. 누군가 그녀의 게시물에 하트를 눌렀다는 알림이 떴고, 아이디가 어딘가 낯이 익어서 들어가보니 P가 친구라고 얘기한 적이 있었던 여자였다. 왠지 기분이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하트를 타고 넘어 들어가보니 더욱 뒷통수가 쎄했다. 왠지 어디서 본 듯한 익숙한 풍경들의 사진들이 있었고, K는 곧 그 풍경들이 P의 게시물에서 본 장소들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다른 것이라고는, P의 게시물은 그 장소에 마치 혼자 간 것처럼 보였지만 그 여자의 사진들에서는 누군가 함께 있었다는 흔적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비슷한 날짜와 시간대, 같은 시점에서 찍힌 사진들을 보며 K는 충격에 휩싸였고, 충격은 곧 실망과 분노로 이어졌다. SNS를 끄고 30분을 우두커니 앉아 망설이다 다시 들어가 확인하니 잘못 눌렀던 것인지 하트는 취소가 되어 있었다. K는 도무지 파악이 되질 않았다. 언제, 어디서부터인지, 어떻게 된 건지, 이게 무슨 일인지,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인지.. 그저 평범한 하루였던 그날 오후 내내 K는 마치 폭풍의 눈 안에 있는 것처럼 고요하고 침착하게 일을 마무리했다. 집에 돌아가는 버스에 멍하니 앉아 저멀리 지고 있는 해를 바라보며 K는 떠올렸다. 다정했던 짙은 눈길, 익살스럽고 과장된 몸짓으로 주변사람들의 흉내를 내는 그를 보며 깔깔거리던 자신, 추운 날씨를 핑계로 K의 차가운 손을 마주잡아 자신의 코트 주머니에 집어넣던 따뜻했던 커다란 손을. 어쩌면 그는 그냥 친절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냥 선수였던 걸지도. 돌아오던 기차 안에서 깜박 잠든 K의 머리를 조심스레 자신의 어깨에 받쳐주던 손길과 유럽으로 올 생각은 없냐며 진지하게 묻던 대화도, 마지막날 밤 자신을 호텔 앞까지 데려다주고는 보고싶을 거라며, 가서도 계속 연락하자며 이마를 맞대고는 한참을 망설이다 다가오던 떨리던 입술과 시간가는 줄 모르고 밤새 나눴던 키스까지도. 오전까지만 해도 자신을 마냥 행복하게만 만들었던 모든 것들이 지금은 그저 의심스러워지자 K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6.

"그냥 거기 같이 간 친구사이일 뿐이야, 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만나고 있는 사람 없어."

P의 대답을 듣는 K의 마음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본인이 아니라는데 왜 내려앉는지 K는 알 수가 없었다.

K가 마음을 가라앉히고 객관적으로 판단해본 바에 따르면 SNS를 통해 존재를 알게 된 여자는 P와 만나는 사이가 아니더라도 최소한 P에게 마음이 있는 것처럼 보였고, 그런 거 아니냐는 K의 물음에 얼버무리는 P의 대답으로 미루어 짐작해 보건데 그도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딱히 피하는 것 같지 않아보였다. 그녀의 SNS에 난무하는 그를 태그한 흔적과 그녀만의 해시태그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P의 대답을 들은 K는 왠지 그 여자가 안스럽게 느껴졌다. 비록 모르는 사람이지만, 매일 그를 옆에서 지켜보며 마음을 졸일 그녀의 마음이 이해가 되었다. 자신보다도 그 여자가 P와 알고 지낸지 더 오래되어 보였고, 심지어 함께 어울리는 사람들도 둘을 한자리에 함께 태그한 것들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결정적으로, K가 일 때문에 가지못했던 크리스마스에 그와 함께했던 것도 그녀였다. 테이블에 놓인 같은 꽃장식의 사진이 그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연말까지 연락이 없었던 것이 떠오르며 K는 더이상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핸드폰 진동이 울리고 화면에 알림이 떴지만 K는 읽지 않았다.


P의 메세지가 여느 때처럼 계속해서 왔지만 그녀는 읽지 않았다. 거의 한 달이 지나고, 마침내 그로부터 더이상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자 K는 그때야 비로소 메세지를 볼 용기가 생겼다. 그는 처음에는 아무렇지 않은 듯 걱정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점차 화가 난 것 같았고, 마지막에 남겨진 메세지는 오히려 자신이 상처받은 듯 보였다. 약간 마음이 누그러진 K는 혹시 싶은 마음에 P의 SNS를 살펴보았다. 최근 게시물에 그가 태그된 그 여자의 새로운 사진이 있었다. 그 둘은 여전히 어울리고 있었고,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그와 K는 지구 반대편 다른 시간대에 살고 있었고, 둘의 거리는 여전히 멀었다. 어느 한 쪽이 움직이지 않는 이상 아무리 노력해도 둘의 사이는 결코 좁혀질 것 같지가 않았다. 하지만 거리가 멀어도 가능한 관계가 분명 존재한다는 것을, 그리고 자신과 P의 사이가 좁혀질 것 같지 않은 이유는 단지 시간과 거리의 문제가 아님 또한 K는 알고 있었다. 
몇날 몇일을 고민하던 K는 SNS를 삭제하고 사라지기로 결정했다. 계정을 삭제하고, 떨리는 손으로 길게 아이콘을 누르자 자신의 손과 똑같이 떨고 있는 모양이 자신을 지우지 말아달라고 애원하는 것 같이 느껴졌지만, K는 가차없이 X를 눌렀고 어플은 곧 사라졌다.

그가 처음에 설치해주었던 어플이 사라지자, 
그와 함께 했던 순간들의 사진들이 사라졌다.
그와 나누었던 대화들이 사라졌다.
그와의 연결고리도 사라졌다.
그리고 마침내 K의 일상에서 그도 사라졌다.

사랑이 시작될 거라고 생각했던 그 곳에는 이제 아무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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