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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숨김 Nov 04. 2019

무생물

18 OCT @섬


1.

K는 강한 조명을 느끼며 눈을 떴다. 하얗다못해 시퍼렇게 느껴지는 형광등의 하얀 빛에 눈이 부셨다. 비록 몸은 여기저기 근육이 당기고 찌뿌둥했지만 마치 오랫동안 잠들었다 깨어난 것처럼 개운한 기분이었다. 피부에 느껴지는 감촉 자체가 낯설게 느껴졌다. 실내 온도는 적당히 산뜻했다. 공기 중에서 왠지 익숙한 잉크 향기가 났다. 고개를 들어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자신의 익숙한 낡은 옷 위로 비닐 옷이 입혀져있었다.

움직이는 기척이 들렸는지 방 안의 빛이 푸르스름한 초록빛으로 바뀌었다. 이윽고 발걸음 소리가 뚜벅뚜벅 들리더니,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환영합니다! 기분이 어떠세요?”

하얀 가운을 입은 이E가 들어와 묻자, K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좋아요.. 그런데 여기가 어디죠?"

E는 눈을 희미하게 뜨고 뿔테안경을 손가락으로 들어올리곤 K를 바라보며 말했다.

"여기는 디지털 라이브러리예요. 잠깐만 상태체크 먼저 할게요. 다시 누워주시겠어요?"

E는 누워있던 자리에 엉거주춤 다시 누운 K의 다리를 똑바로 올려주며 데이터를 확인했다.

E가 휘파람을 불자, 공중에서 드론이 나타나더니 K의 몸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빨갛고 긴 라인의 조명을 비췄다. 몸에는 아무 느낌이 없었지만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아직 파악이 힘든 K로서는 괜히 긴장이 되었다.

"ISBN 8932015961, 1934년 출생, 대략 490페이지. 무게 약 504 그램 수치 정상, 컨디션 좋음, 준비완료."

확인을 다 마친 것 같은 E가 K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따라오세요, 이제 새로 태어날 준비를 하러 갑시다."


2.

K와 E는 함께 하얀 복도를 쭉 따라 걸었다. 도대체 어떻게 생긴 건물인지는 모르겠지만 복도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매우 길었고, 복도의 좌우로 매우 많은 문이 있는 걸로 보아 자신이 깨어난 방말고도 수많은 방들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몇몇 방들은 문이 열려있었는데 밖에서 언뜻 보았을 때 모든 방의 크기나 분위기가 다른 것처럼 보였다.

"저...새로 태어날 준비라는 게 어떤 건가요? 제가 죽은 건가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E가 대답했다.

"아닙니다, 애초에 무생물인데 죽을다는 건 말이 안되죠. 다만 오래되었기 때문에 파손되거나 썩을 수는 있겠지만요. 선생님이 태어나셨던 과거 이후 세상이 점점 발전해서 많이 좋아졌어요. 이제 세상에 종이책을 읽는 사람은 거의 없답니다. 지구의 자원 문제로 더이상 책을 만들 수 있는 종이가 고갈되었거든요. 종이책 자체도 많이 남아있지 않고요.아까 말씀드렸던 것처럼 이곳은 디지털 라이브러리로서 선생님처럼 연세가 오래되신 책들을 디지털화시켜서 그 가치와 본질을 살려내고, 저장해서 아카이빙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 과정을 다시 태어난다고 하죠. "

"그럼 그 다음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말 그대로 디지털로 된 문자로 다시 태어나셔서 계속 많은 사람들에게 읽힐 수 있게 됩니다. 지금 저희는 그 과정을 진행할 수 있는 곳으로 가고 있고요."

여전히 궁금한 점이 많았지만 E가 발걸음을 서두르는 것 같아 K는 더이상 묻지 않고 그의 뒤를 따랐다.


3.

긴 복도를 앞서 걸어가던 E는 중간 중간 길을 틀어 다른 복도를 통해 가기도 했는데, 그 발걸음이 매우 경쾌하고 가벼워서 K에게는 너무도 복잡해서 마치 미로같이 느껴지는 이 경로를 그는 이미 훤히 잘 알고 있는 듯 보였다. 목적지가 어디인지 모르고 가는 길은 지루하기도 하고 꽤 복잡해서 K는 금세 지치고 말았다. 빠른 걸음으로 걷던 E는 K가 나이가 든 책이라는 걸 그때서야 인지했는지 미안해하며 천천히 걷자고 했다. 복도를 지나면서 K는 다양한 방들을 둘러볼 수 있었는데, 처음으로 지나친 곳은 그야말로 바글바글한 곳이었다. 안이 얼마나 꽉찼는지 복도 밖으로까지 사람들이 나와있었다.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던 K는 문 앞에서 샴페인잔을 들고 있던 무리의 발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미안해요, 라고 말하는 이를 올려다보니 하나같이 다들 겉표지가 매우 화려하고 사진이 많았다. 후레시가 터지는 소리도 들렸는데 그에 따라 표지가 바뀌면서 포즈를 취하는 책들도 많았다.

“여기는 잡지들을 모아놓은 곳이에요. 다들 자극적인 가십을 좋아하고, 진실된 정보에는 별로 관심이 없죠. 흥미로워할만한 얘깃거리들이 넘쳐나는 곳이라 이렇게 와글와글한 거에요. 물론 잡지분들 중에 의미있는 스토리를 담는 책들도 있지만 별로 인기가 없다는 게 아이러니죠.”  

함께 걷던 E가 방안을 슬쩍 보던 K에게 다가와 설명해주었다. K는 걷다가 한눈을 판 것이 겸연쩍어 그렇군요, 라고 다시 발을 옮겼다.

그 다음 지나친 방은 오래전 조선시대의 성균관같이 생긴 곳이었다. 그 곳에는 한 눈에 봐도 오래되고 바랜 차림의 고서들이 근엄한 표정을 하고 정갈하게 앉아 차를 마시며 붓으로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마치 과거시험이라도 열린 분위기여서 혹여 방해라도 될까싶어 K는 서둘러 지나쳤다.

이어서 알록달록한 장난감과 상상 속 동물들로 가득한 어린이용 동화의 방을 지나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들을 주고받는 다양한 국적의 책들로 이루어진 글로벌한 느낌의 번역서들의 방을 지나갔다. E는 이 곳이 한국 책을 외국어로 번역한 교포출신의 책들과 외국 책을 한국어로 번역한 외국인 책들로 분류된다고 말해주었다.


4.

가장 인상깊었던 곳은 마치 옛날 신문사같은 느낌의 방이었다. 종이서류들이 잔뜩 쌓인 나무 책상에 무표정한 사람들이 앉아 눈을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이 곳의 모든 것은 흑백이어서 마치 무성영화를 보는 것 같이 느껴졌다.

“이 곳은 옛날 신문들을 모셔놓은 곳이에요. 인터넷이 발전된 이후로 사람들이 점점 종이로 된 신문을 보지 않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종이신문 또한 점점 소멸되었거든요. 하지만 그만큼 희소성이 높아졌죠. 미래를 예측하려면 그만큼 과거를 아는 것 또한 중요하다는 걸 사람들이 깨달았거든요.”


“어떤 책들이 여기에 오게 되나요? 벌써 새로 태어난 책들도 있는 거죠?”

한참을 따라 걸으며 설명만 듣던 K가 마침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물론입니다. 선생님 전에도 벌써 1억권은 넘는 책들이 새로 태어나 디지털 책이 되었죠. 기본적으로는 먼저 정보를 다루는 책들이 가치를 판별받고 먼저 오게 되요. 그만큼 수요가 많거든요. 학문과 지혜를 다루는 책들도 많이 오는데 정보를 다루는 책보다는 양이 많지 않기 때문에 원본의 가치가 중요해졌어요. 소설이나 시들도 오는데 이 분들은 작가나 출판사에 따라 성격이나 성향이 다릅니다. 같은 책이 다른 나라 언어로 번역된 것들은 말할 나위도 없지요. 책들이 디지털화되기 시작하면서 세상 또한 많이 달라졌어요. 예전에는 책을 물질적으로 소유하고 읽어야만 알 수 있었다면, 이제는 그 책을 소유하지 않고 심지어는 읽지 않았어도 인터넷으로 그 책의 내용을 찾아볼 수 있죠. 사람들이 다소 수동적으로 책을 골라서 읽었다면 이제는 책이 사람들에게 찾아가서 말을 걸 수도 있답니다. 잡지들 같은 경우 겉표지를 화려하게 바꿔가면서 스스로 홍보를 하기도 하죠. 마치 사람같죠? 정보나 지식을 소유하는 것 이상으로 책들이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어요.”


E의 이야기를 듣던 K는 점점 사람이 책인지 책이 사람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애초에 사람은 생물이고 책은 무생물인데, 세상이 아무리 달라지고 좋아졌어도 그렇지 책이 사람처럼 되다니? 근현대에 태어났던 K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이야기였지만 한편으로는 흥미롭기도 했다.


갑자기 E가 우뚝하고 멈춰서며 말했다.

"이 곳입니다, 들어가시죠."

아무리 걸어도 나올 것 같지 않던 복도의 끝에 초록색 문이 하나 있었다. K는 떨리는 손으로 문을 열었다.

“다시 태어나게 된 걸 축하드립니다. 새로운 세상에서 만나요!”  

E는 따라들어오지 않았다.


5.

마침내 방에 들어가자, K는 잠깐 시야가 보이지 않았다. 정확히는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방 안이 어두운 것이었지만 순간적으로 공포가 느껴졌다. 하지만 곧이어 멀리서 반짝거리는 빛들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것들은 글자들이었다. 동시에 자신의 안에 담겨있던 단어들이 하나 둘씩 공중으로 떠오르고, 빛을 발하더니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K는 넋을 잃고 자신의 몸에서 나오는 별빛들을 바라보았다. 그 광경은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절대 잊혀지지 않을 것 같았다. 기억을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만약 자신에게 기억이 남게 된다면 이 장면만큼은 마음 속 깊이 새기고 싶다고 생각했다. 한참동안 떠오르던 별빛들이 공간 전체를 밝힐 수 있을만큼 점점 커지고, 마침내 K의 온몸의 빛이 사라졌다. 그렇게 K는 디지털 세상을 밝히는 밤하늘의 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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