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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숨김 Dec 20. 2019

기다림

15 NOV @섬

저녁 어스름이 서서히 하늘에 푸른 멍처럼 번지는 걸 바라보며 버스에 몸을 싣는다. 텅텅 비어있던 버스는 중앙역을 지나자마자 캐리어를 든 사람들로 꽉꽉 채워진다. 사람들은 마치 스포이드로 감정을 쏙 뽑아낸 것처럼 하나같이 표정이 없다. 엄마 옆에서 조잘거리며 떠드는 아이의 보채는 듯한 목소리만이 들릴 뿐, 각 역에 도착할 때마다 자동으로 나오는 기계음 외에 버스 안은 그야말로 조용하다. 아니, 조용했다. 보채던 아이가 울음을 터트리기 전까지는. 갑작스런 소음에 승객들은 두리번거리기 시작했지만 곧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온다. 바깥은 이미 어둡다. 써머타임이 끝나자마자 여름에 그토록 강하게 내리쬐던 태양은 벌써 겨울잠에 들어갔는지 요며칠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고, 어두운 아침을 맞이하는 것이 이제는 익숙해졌다. 잠깐 멍하니 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창밖으로 저멀리 공항의 관제탑이 눈에 들어오고, 마침내 터미널 입구에 도착한 버스에서 사람들이 짐을 챙겨 내린다. 발을 동동 구르며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던 곱슬머리 청년이 버스 문에 틈이 열리자마자 뛰쳐나가더니 금세 시야에서 사라진다. 울던 아이는 어느새 아빠의 품에 안겨 조금은 겁먹은 눈망울로 신기한듯 주위를 둘러본다. 무거워보이는 짐을 끙끙거리며 들고 내리는 아주머니의 뒤를 따라 버스에서 내리자 바깥의 냉기가 순식간에 몸을 감싸안는다. 입김이 하얗게 서린다. 서둘러 안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에 손을 비비며 주머니에 넣고는 자동문을 통해 공항 안으로 들어선다.


얼핏 보면 마치 고속버스터미널처럼 생긴 이 곳은 무려 독일의 수도 베를린의 공항이다. 연간 이용객 수로 프랑크푸르트, 뮌헨, 뒤셀도르프에 이어 4위로 방문객이 많다는데, 올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이 곳은 정말이지 너무 별 게 없다. 물론 최소한으로 있을 건 있다, 가게도 있고 레스토랑, 빵집, 까페, 환전소, 여행사, 기념품 등을 파는 곳도 있다. 하지만 한바퀴 동그랗게 15분 정도 돌고나면 메인터미널을 다 봤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나면 더 이상 할 것이 없는데, 그도 그럴 것이 게이트 안에 일찍 들어가봤자 면세점도 벽 한쪽에 도서관 책장같이 세워진 것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공항을 이용하는 대부분의 승객들은 터미널에서 최대한 시간을 보내다가 게이트로 들어가 비행기에 탑승하곤 한다. 그런 이유로 이 터미널에서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을 관찰할 수가 있는데, 그것이 정말 볼거리가 없는 이 공항의 유일한 볼거리라는 사실은 그닥 놀랍지 않게 느껴진다.


입구에 들어가니 역시 마치 고속버스 정류장에 있는 것과 비슷한 크기의 전광판에 수많은 항공편들이 깜박이고 있다. 도착하는 비행기편과 게이트 넘버를 확인한 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터미널의 대합실에 들어서기도 전에 바닥에 짐을 풀고 주저앉아 짐을 정리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분명 누군가를 위한 선물을 샀거나, 짐의 무게가 넘어 다시 정리하는 중일 것이다. 기둥 뒤에 있는 자판기의 뒤쪽에 충전기를 꽂고 바닥에 앉아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단발머리 남자의 뒤로, 벤치에 앉아 귀에 이어폰을 꽂고 휴대폰 화면에 거의 빠져버릴 듯한 아주머니와 그 옆에 앉아 오늘 아침부터 집에서 정성껏 싸온 듯한 참치 샌드위치를 오물거리는 여자분의 앞쪽에 빈 자리가 눈에 들어왔다. 게이트의 출구도 한눈에 보이고, 아래에 라디에이터가 있어 추운 몸도 녹일 수 있는 좋은 자리이다. 혹시라도 누가 앉을까 싶어 후다닥 뛰어가 가방을 올린다. 자리에 앉으니 살짝 높아서인지 발끝이 살짝 닿지 않는다. 다리를 흔들거리면서 주변 사람들을 살펴본다. 이 곳에 앉아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곧 열릴 항공편의 탑승을 기다리는 사람들일 것이다. 내 자리의 건너편 오른쪽 끝에 앉은 여자아이는 아까부터 계속 앉아서 노트북을 꺼내 무언가를 하고있는 척하지만 사실 주변을 관찰 중인 나를 흘금흘금거리다 이내 피곤한지 벤치에 길게 몸을 뻗더니 이내 엄마의 무릎을 베고 눕는다. 엄마는 아이에게 겉옷을 이불처럼 덮어주곤 이마를 쓰다듬는다. 그 와중에 앞에 앉은 여자분은 배가 많이 고팠는지 샌드위치를 네 개째 해치우고 있었다. 참치와 오이의 향이 벤치 주변을 메우자 왠지 슬슬 배가 고파왔다. 잠시 오는 길에 보았던 임비스에 가서 커리부어스트라도 사먹을까 고민하다 이내 혼자 먹을 순 없지, 하고 생각하곤 게이트로 다시 눈을 돌린다.

옆 게이트가 열리고 앉아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나 줄을 서기 시작했다. 벤치를 가득 채우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빠져나가고 나 홀로 덩그러니 남았다. 엄마 무릎에 누워있던 아이도, 휴대폰만 들여보던 아저씨도, 샌드위치를 먹던 아줌마도 모두 게이트 안으로 사라지고, 게이트 앞에 앉아있는 보안요원과 오직 공항을 돌며 순찰하는 경찰들만이 주변을 맴돌고 있다.

18시 45분. 15분만 기다리면 뭔가 먹거나 혹은 먹을 메뉴를 정할 수 있을 것이다. 옆의 게이트 앞은 또다른 사람들로 채워지고 있었다. 내 앞의 벤치의 반대편에 나말고 다른 누군가가 나와 같은 위치에 시선을 보내고 있다. 그는 줄곧 시간을 확인하며 핸드폰 화면을 껐다, 켰다를 반복했다.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하며 손을 쥐었다 폈다 주머니에 꽂았다 뺐다가 아주 정신이 없어보였다. 누가 봐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매우 초조해보이는 그는 그야말로 초조함의 모든 증상을 내보이며 자신의 기다림의 상태를 표현하고 있는 것 같아보였다.


앉아있던 게이트 앞의 전광판에 글씨가 마침내 깜박거리기 시작했다. 유리창 너머를 보니 사람들이 보인다. 남자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게이트 앞으로 가더니, 마찬가지로 게이트 문이 열리자마자 뛰쳐나온 여자를 거뜬히 품에 안아들며 격렬한 포옹을 해댔다.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왠지 흐뭇한 웃음이 지어지는 것이 마치 스스로 산전수전 다 겪고 관계에 통달한 노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다.

이렇게 볼품없는 장소조차도 이 순간만큼은 이런 허름한 외양따위 그들에게는 상관없을 것이다. 지금만큼은 이 공항이 그 어떤 경관이 멋진 곳보다도 간절하게 오고싶었던 장소이리라.

어쩌면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은 기다림이 존재하는 곳,

그리고 그 수많은 기다림의 결말을 읽을 수 있는 곳.


여기까지 생각이 다다랐을 때, 익숙한 곱슬머리가 저 멀리 다른 사람들의 머리와 함께 둥둥 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리웠던 동그랗게 쳐진 눈이 나를 향한 반가움에 찡긋 웃음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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