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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숨김 Jan 26. 2020

초대

먹다, 20 DEC 2019 @섬

그건 제가 지금까지 받았던 초대 중에 가장 이상하고 불쾌한 기억이었어요. 심지어 아직까지도 그때의 분위기가 생생할 정도니까요. 지금으로부터 7년전, 저는 학교를 졸업하고 한 갤러리에서 두달간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습니다. 저야 갓 사회에 나온 초년생이었기때문에 이름만 들어선 잘 알지는 못했지만 그 갤러리는 일단 유명인사들이나 상류층 부자들이 사는 지역에 위치해 있었고, 정말 크고 화려해보이는 공간에 나름 이름있는 작가들이 자신의 그림을 진열하고 싶어하는, 그리고 아침 저녁으로 어느 기업의 자제가 방문해 둘러보곤 오늘 저녁만찬에 걸 그림을 골라가는, 전형적인 사교의 장이었습니다. 그 곳에서는 거의 2-3주마다 한번씩 새로운 작가의 전시 오프닝 파티가 열렸고, 한달에 한번씩 근처의 호텔에서 열리는 아트페어에 참가하기도 했습니다만, 저는 한낱 알바생이었는데다 두달만 일하기로 되어있었기 때문에 평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출근해 작품들의 상황을 체크하고, 작품을 구매할 가능성이 있는 잠재적인 소비자들을 응대하는 간단한 업무만 맡아서 하게 되었죠. 크게 힘든 일도 아닌데다, 하는 일에 비해 약속된 보수가 나쁘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일이 쉽게 느껴졌습니다. 심지어 일이 너무 쉬워서 이렇게 일하고 이 돈을 받아도 되는 것인가하는 마음이 들 정도였으니까요. 처음에 일을 시작했을 때에는 아는 지인에게 추천받은 거라 그 갤러리의 대표분은 직접 만나보지도 못하고 큐레이터라는 사람만 만나 얘기만 나눠보고 시작한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뭐 바빠서 일개 알바생따위는 만날 필요가 없을수도 있지, 라고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습니다. 큐레이터라는 분도 왠지 어딘가 눈빛이 어둡고 안색이 창백한 것이 조금 불안했지만, 어차피 두달짜리 아르바이트였으니까요. 지금 생각하면 그것부터 의심했어야 하는 것인데 말이예요.

 일을 시작한지 한달이 조금 지났을 때 열린 파티에 처음으로 저도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일하는 목적이었지만, 이런 곳에서 열리는 파티는 어떤지 내심 궁금했죠. 저녁이 되고 1층의 통유리 너머로 하나둘씩 외제차들이 도착하는 게 보였고, 앞에서 기사가 내려 뒷문을 열어주며 옷을 받아드는, 드라마에서나 보던 장면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름있는 기업의 대표와 자제들, 그리고 티비에서 봤던 연예인들과 모델들이 조금이라도 세게 내려놓으면 부셔질 것 같은 값비싼 샴페인잔을 손에 들고 다니며 서로 인사를 나누었고 함께 따라온 수행비서들은 갤러리 공간을 가로질러 세워진 긴 테이블에 차려진 핑거푸드들을 행여 옷에라도 흘릴까 조심스레 집어들고는 접시에 담아 자신의 주인들이 손짓을 하면 그에 맞춰 접시를 내밀었습니다. 잠시 후 갤러리의 뒤쪽에서 작가와 함께 갤러리의 대표가 나타났는데, 그 대표를 실제로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살짝 흰가닥이 섞인 회색머리의 풍채가 좋고 중후한 분위기를 지닌 중년의 남자로, 마치 성악가같은 낮고 목소리를 가지고 있어 입을 열면 멀리서도 그 울림이 들릴 정도였습니다. 그는 다양한 사람들과 이미 알고있는 사람처럼 매끄럽게 초대한 손님들의 사이를 오가며 대화를 나누고는, 또 어느샌가 조용히 언제 있었냐는듯 사라졌습니다.


그를 다시 만난 건 그로부터 3주뒤였습니다. 두달 간의 아르바이트가 거의 끝나갈 즈음이었는데, 갑자기 모르는 번호로 문자가 와있더라고요. 대표로부터의 호출이었습니다. 할 얘기가 있으니 다음날 아침 출근 전에 사무실로 와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저같은 일개 아르바이트생에게 무슨 할말이 있을까 싶어 궁금한 마음도 있었고, 파티에서 봤던 그 대표가 개인적으로 연락을 했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해서 딱히 의심도 하지않고 알겠다고 대답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알려준 주소로 찾아가보니, 그곳은 왠 허름한 오피스텔이었습니다. 왠지 사무실이 어딘가에 따로 있을 줄 알았는데 오피스텔에 있는 건가, 싶어 이야기해준 대로 엘레베이터를 타고 14층을 눌렀습니다. 14층에 내리자 똑같이 생긴 수많은 문들이 보였는데, 문들 사이의 흰 벽에 간혹 갈라진 틈새들이 왠지 분위기를 스산하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여기가 정녕 맞는 것인가 의심을 하고 있는데 복도 끝에 문이 살짝 열려있는 곳이 보였습니다. 문자를 확인해보니 바로 그 곳이었습니다. 열린 문을 똑똑 두드리자 안에서 들어와요, 하는 낮은 목소리가 울렸습니다. 전에 파티에서 들었던 그 목소리였죠.

안에 들어가자 전에 봤던 그 대표가 책상에 앉아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방은 매우 좁았고, 부엌과 화장실이 딸린 원룸이였는데 중간에 가벽으로 공간이 분리되어 있는 걸로 봐서 아무래도 그 공간은 사무실 겸 숙소였던 모양입니다. 엄청난 서류더미들이 곳곳에 쌓여있었고, 잡다한 일상적인 물건들이 여기저기 정리되지 않은 상태로 널려있었습니다. 어디앉아야할 모르겠어서 눈알을 굴리며 서있자, 대표가 여기 앉으라며 구석에 있던 의자 위의 서류더미를 다른 서류더미 위에 옮겨놓곤 위에 쌓인 먼지를 대충 슥슥 닦아 건네주었습니다. 테이블 위에는 각종 약봉투와 약통들이 놓여있었고, 쓰려져있는 것도 있었는데 슬쩍 보니 라벨에 항우울제라고 써있었습니다. 파티때 보았던 단정했던 머리카락은 헝클어져있었고, 심지어 그는 방금 막 일어난 것처럼 보였죠. 군대를 갓 제대한 동아리 선배가 입던 것 같은 깔깔이 조끼를 입은 그는 잠깐만 기다려줘요, 하더니 바삐 컴퓨터 키보드를 두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엉거주춤 앉아 어디에 시선을 둬야할지 모르겠어서 멍하니 가벽쪽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였습니다. 가벽 뒤쪽의 커튼이 움직이더니, 왠 여자가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마찬가지로 너무나도 편해보이는 차림으로요. 도무지 가족이나, 친척으로는 보이지 않는 저와 나이차도 별로 나지 않을 것 같은 그 여자는 저와 눈이 마주치고도 전혀 당황하지않고, 마치 이런일이 자주 있었다는 듯이 태연하게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건네곤 너무 아무렇지 않게 아침 먹었어요? 라고 물었습니다. 나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가 싶어 어버버거리며 네 먹었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이제 아침 좀 먹으려고 하는데 같이 먹지 않을래요? 라고 재차 물었습니다. 저는 괜찮습니다라고 손사레를 쳤지만, 대표가 그냥 같이 먹읍시다, 라고 해서 그냥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공기가 불편해서 얼른 이야기를 끝내고 나가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그 여자가 블루베리와 라즈베리, 바나나와 꿀과 견과류가 뿌려진 오트밀과 오렌지와 치즈 위에 석류와 발사믹 소스가 뿌려진 샐러들를 만들어 와서는 접시에 담아주었는데, 이런 공간에서 그런 브런치같은 음식을 먹으니 정말 언발란스하게 느껴졌습니다. 마침내 셋이 한 테이블에 앉아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여자분의 우리는 보통 이렇게 먹는데 입에 맞을진 모르지만 먹어봐요, 하는 말에 마지못해 수저를 들고 한입 떠먹었는데 이 상황에 정말 아이러니한 것은 한사코 거절했던 것이 무색하게 정말 맛있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사실 아침을 먹지 않았었거든요. 거절했다가 너무 맛있게 먹기도 좀 뭐해서 조심스레 한 입씩 떠먹었습니다.

그리고는 저에게 하실 말씀이 무엇인지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대표는 흠흠, 하고 헛기침을 하더니 혹시 이 갤러리에서 정식으로 더 일해줄 수 있는지 묻는 것이 아니겠어요. 저는 눈알을 굴리며 이유를 물었습니다만, 사실은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파티날 대표가 나타났다 사라진 후 장소를 정리하면서 저는 큐레이터에게 이 갤러리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겉으로는 화려해보이는 이 공간이 곧 있으면 다른 곳으로 인수될 예정이며, 지금 현재의 재정상태가 좋지 않은지 자신을 포함해 그동안 이 곳을 거쳐갔던 그동안의 큐레이터들이 몇달동안 임금을 받지못하고 있어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갑작스럽게 그날 파티에 지원된 이유도 일하던 사람이 대표와 싸우고 그만뒀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이미 지난 한달 일한 급여를 받은 상태였기때문에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이 얘기를 듣고 조금 놀랐지만, 어차피 다음달까지만 일할 생각이었기때문에 저랑은 딱히 상관없는 이야기일거라 생각하고 그렇군요, 하고 대답만 하고는 별다른 얘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대표가 흠흠하고 헛기침을 계속하며 저에게 일하는 동안 지켜보니 성실하고, 능력도 좋은 것 같다는 둥의 이야기들을 ㅡ 심지어 그동안 한번도 이야기도 나눠본적도 없으면서 ㅡ 나열하는 동안 저는 오트밀을 떠먹으며 머릿속으로 어떻게 자연스럽게 거절을 할지를 고민했습니다. 이와중에 이 오트밀은 스스로 어이가 없을만큼 정말 맛있어서, 저는 두사람보다도 더 먼저 그릇을 비우고말았습니다. 여자가 저에게 좀 더 줄까요? 라고 말했고, 저는 아주 잠시 망설였지만 대표가 큼큼하고 헛기침을 하곤 잘먹네, 라고 웃자 왠지 입맛이 싹 사라져 헛구역질이 나올 것만 같았습니다. 겨우 참고는 괜찮습니다, 라고 대답한 뒤 나는 내가 생각한 거절의 대답을 하고는 후다닥 짐을 챙겨 그곳을 빠져나와버렸습니다. 더이상 그곳에 있다가는 그 곳의 공기에 짓눌려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 공간에서 나는 기묘한 냄새가 그 짧은 사이 나에게도 밴 것만 같아 하루종일 킁킁거리며 확인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날 결국 나는 체해서 저녁까지 아무것도 먹지 못했습니다.

후에 아르바이트가 끝난 후 이야기를 들으니 그 갤러리대표는 결국 파산을 했고, 이미 파탄이 난 가정또한 망가져 이혼한 후 자식들마저도 등을 돌렸으며, 일했던 사람들이 모여 소송을 건 모양이었습니다. 저에게도 그 큐레이터가 연락이 와 함께 소송하겠냐고 물었지만, 저는 한 달의 급여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기때문에 더이상은 그 곳과 엮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 이후로는 그곳의 사람들과도 더이상 연락하지 않습니다만, 이상하게도 그 곳의 오트밀과 샐러드는 가끔씩 생각이 납니다. 정말 맛있었어서인지 아니면 그 곳의 이상했던 분위기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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