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법정 밖의 실존

형별과 도피를 넘어 자아로의 회복

by soominC

자기비난은 이성이 스스로에게 가하는 가장 가혹한 형벌이다. 그것은 객관적 성찰의 탈을 쓰고 나타나지만, 실상은 주관적 혐오를 논리적으로 정당화하려는 시도에 가깝다. 자아는 검사이자 피고인이 되어 끝없는 논고를 이어가며, 스스로를 완벽이라는 도달 불가능한 이데아에 비추어 심판한다.


이 비난은 누구의 것인가. 프로이트의 초자아가 여기 있다. 내면화된 권위의 목소리, 부모의 꾸짖음, 스승의 훈계, 사회의 규범이 나의 목소리인 양 울려퍼진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외부에서 온 것임을 잊는다. 그 목소리를 내 것으로 착각하면서, 나는 스스로를 억압하는 완벽한 시스템을 구축한다. 외부의 감시자가 필요 없다. 내가 나를 감시하고, 처벌하고, 통제한다. 푸코가 말한 ‘자기배려’의 왜곡된 형태다. 배려는 감시로, 돌봄은 처벌로 변질된다.


이 잔혹한 재판이 끝난 자리에 남는 것은 폐허가 된 자존감이다. 바닥이난 자존감을 되찾기 위해 이때 자아는 돌연 태도를바꾸어 자기연민이라는 도피처를 마련한다. 방금 스스로를 처벌했던 그 손으로 자신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주인공의 서사를 써 내려간다.


참을 수 없이 지친 순간, 판사는 법복을 벗는다. 피고석으로 내려와 스스로를 안으며 속삭인다. “괜찮아, 넌 잘했어. 누구도 완벽할 순 없어. 넌 충분히 노력했어.” 자기연민이 흐른다.눈물이 날 때도 있다. 이 순간 나는 나를 용서받을 수 있는 존재로 재구성한다. 하지만 이 용서는 진짜 화해가 아니다. 단지 비난의 피로에서 잠시 도피하는 것일 뿐. 들뢰즈가 말한 ‘재영토화’가 일어난다. 비난이라는 영토에서 탈주했지만, 곧 연민이라는 새로운 영토에 정착한다. 나는 여전히 나를 대상화하고 있다. 비난받을 객체에서 연민받을 객체로 위치만 바뀌었을 뿐.


법정을 떠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판사도 피고도 되지 않는 것. 스피노자가 말한 ‘코나투스’, 존재하려는 노력으로서의 나를 받아들이는 것. 나는 완벽하지도 가엾지도 않다. 나는 단지 존재하고 있다. 실수하고, 성장하고, 때로 후퇴하고, 다시 일어서는 과정 그 자체로서. 법정의 언어를 버리고, 경험의 언어로 말하기 시작하는 것. “나는 실패했다”가 아니라 “그 순간 그렇게 반응했다”. “나는 나약하다”가 아니라 “지금 힘들다”. 판단에서 묘사로, 정죄에서 관찰로. 그 전환 속에서 자기비난과 자기연민이라는 이분법은 해체된다. 남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나, 법정 밖의 나, 매 순간 새롭게 펼쳐지는 나의 실존이다.​​​​​​​​​​​​​​​​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