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병에 생화와 조화, 두 가지 꽃이 꽂혀 있다.
생화에선 짙은 향기가 난다. 금방이라도 나비와 벌이 날아와 앉을 듯 생생하다. 반면 조화에게선 생화가 뿜어내는 '살아 있음'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향기 없는 꽃이다.
하지만 아름다움은 순식간이다. 화병의 물은 말라가고, 생화는 점차 시들어 간다. 그렇게 죽어가고 있다.
그 때, 조화가 비로소 꽃을 피운다. 살아있지 않기에 죽어가지도 않는 것이다. 말라버린 생화를 내려다보며, 조화가 마치 꽃웃음을 치는 것만 같다.-
모든 이야기는 변화를 필요로 한다. 생화에게는 서사가 있다. 봉오리였다가 만개했다가 시들어간다. 생화는 이야기될 수 있다. “저 꽃이 얼마나 아름답게 피었는지 봤어?“라는 문장이 성립한다. 과거형으로 말해질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생화를 기억 가능하게 만든다. 반면 조화는 현재형에 갇혀 있다. “저 꽃이 있다”는 말할 수 있지만, “저 꽃이 어땠는지 기억나?“라고는 물을 수 없다. 변화 없는 존재는 회상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생화가 떠난 자리는 비어 있어도 가득 차 있다. "여기 예쁜 꽃이 있었지"라는 추억이 그 공간을 채운다. 그러나 조화는 그 자리를 꽉 채우고 있어도 공허하다. 먼지 쌓인 조화를 보며 우리는 아무런 이야기도 떠올리지 않는다. 사랑은 완벽함이 아니라 결핍에서 오고, 기억은 머무름이 아니라 떠남에서 온다. 남겨진 조화의 웃음이 서글픈 이유다.
사라지기에 기억되는 것은, 존재가 시간과 계약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생화는 ‘지금’이라는 조건 아래에서만 향기를 낸다. 향기는 영원한 속성이 아니라, 사라질 것을 전제로 잠깐 빛나는 증거다. 그래서 생화의 아름다움은 언제나 유한하고, 유한하기 때문에 더 또렷하다. 존재는 끝을 향해 가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드러낸다.
반대로 남겨지기에 잊히는 것은, 시간이 닿지 않는 것의 역설이다. 조화는 변하지 않는 대신 사건을 만들지 않는다. 사건이 없다는 건, 기억의 갈고리가 걸릴 곳이 없다는 뜻이다. 변화가 없으면 서사가 없고, 서사가 없으면 ‘기억할 이유’가 희미해진다. 오래 남는 것은 계속 남아 있는 동안 오히려 배경으로 밀려난다.
아이러니하게도 생화는 죽음으로써 생명력을 증명하고, 조화는 생존함으로써 무생물임을 증명한다. 화병에서 생화가 치워질 때 우리는 상실감을 느끼지만, 조화는 그곳에 있는지조차 잊어버린다. 잊히지 않기 위해 영생을 택했을 조화는, 바로 그 영원함 때문에 철저하게 잊히고 말았다.
화병 앞에서 생화와 조화는 ‘진짜/가짜’의 윤리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무엇이 존재를 존재답게 만드는가.
그것은 썩지 않는 육체를 갖는 것이 아니라, 흐르는 시간에 기꺼이 몸을 맡겨 허물어지는 일이다. 조화의 웃음 뒤에 생화의 눈물이 있다면, 그 눈물이야말로 존재의 증명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