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은 누가 시키는 게 아니라서

#9 바르셀로나와 파리의 일상적 상처

by 들숨날숨

"그래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좋지 않을까?"

긍정은 누가 시키는 게 아니라서, 그래서 아마 우리가 안됐을 거야.


늘 웃는 상이었다.

어릴 때부터 해실 해실 웃고 있어서 해실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어머니는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방법을 해실이에게 알려주었다.

해실이는 어느새 청춘이라고 불리는 나이가 되었다.

그러고선 예전부터 츄러스가 먹고 싶었다며 바르셀로나로 훌쩍 떠났다.


바르셀로나에 온 밝은 해실이를 좋아하게 된 어떤 남자 친구가 있었다.

교환학생 네트워크, ESN에서 핀초(Pincho) 투어 공지가 올라오자마자 바로 신청한 해실이의 기억에서 시작한다.

투어 전부터 해실이는 이쑤시개의 무한한 상상력에 감탄하고 있었다.

이쑤시개로 각종 치즈, 구운 가지, 토마토, 대구, 하몽, 연어 등 맛이 없을 수 없는 재료들을 빵과 함께 끼워 놓은 광경은 참으로 화려했다.

윤기가 흐르는 핀초와 함께 먹을 레몬 맥주 끌라라(Clara)에 한층 더 달궈진 침이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그때 우연히 같이 먹게 된 남자 친구가 말을 걸었었다.

멕시코에서 왔다고 했다. 그때 축구, 바르셀로나, 한국, 멕시코 등 여러 이야기를 하면서 꽤나 친해졌다.


그 친구는 그 이후로 해실이에게 뜬금없이 주말에 뭐하냐고 묻곤 했다.

하필이면 여행이나 다른 약속이 있을 때를 골라 메시지가 왔었고, 해실이는 안될 것 같다는 답을 할 뿐이었다. 어쩔 수 없는 거절일 뿐이었고,

아, 그때 해실이는 연애 감각이 그렇게 발달되어 있지 않았었다.


하지만 교환학생 네트워크라는 미명 하에, 그 친구와 해실이는 이후에도 종종 여행을 같이 가게 되었다.

타라고나, 사라고사 등 모두 예쁜 곳이었다.

특히 고야의 고향인 사라고사에서는 디즈니 영화에 나올 법한 오래된 성 너머로 노을이 물들고는 했다.


해가 밝게 떠 있을 때 그 친구와 해실이는 서로 다른 친구 무리와 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전체 인원은 오십 명 남짓이었고, 만나기 마련이었다.

해실이가 사진을 찍고 있을 때, 그 친구는 사진을 찍어주겠다며 다가왔다.

꽤 잘 찍어주었고, 고맙다고 했다.

그 친구가 자신의 무리로 돌아가려던 차에, 그 무리가 수군대기 시작했다.

시끌벅적하던 그 무리는 웃으면서 그 친구를 해실이에게 다시 돌려보냈다.

둘의 사진을 같이 찍어주겠다고 했다.

약간 어색하게 서 있던 그 친구는 웃음기 가득한 무리의 소리에 조금 더 가까이 섰고, 사진을 찍었다.


그렇게 해실이의 무리로 그 친구는 자연스레 합류했고, 해는 자연스레 떨어지고 있었다.

모두가 푸른색 사이로 다홍색과 흰색 실로 엮어낸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순간,

그 순간이 사진으로 담겼고,

해실이의 뒷모습이 담긴 사진은 그 친구의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올라갔다.


하늘을 바라보던 해실이를 바라보던 그 시선이 따스하게 다가왔을 때였다.

학교 스페인어 수업이 늦게 끝나는 날이었다.

웬일로 친구들이 기다려준다고 했고, 끝나자마자 달려갔다.

친구들 틈 사이로 그 친구가 보였다.

기다려준 친구들이 고맙고 미안해서 어서 집으로 가자는 말부터 나왔다.

그랬더니 그 친구가 말했다.

"너를 두 시간 동안 기다렸는데 집에 간다고?"


"그럼 나랑 뭐 하고 싶은데?"

아, 그때 해실이는 연애 감각이 그렇게 발달되어 있지 않았었다.

그렇게 그 친구의 말문을 막아 버리더니,

아무 말도 못 하는 그 친구에게 밥이나 먹자고 하였다.

둘이서만 보는 약속은 그렇게 처음 성사되었다.

밥을 10시에 먹자고 하는 그 친구에게 배고프다며 8시로 당겼고,

사그라다 파밀리아 근처 식당으로 들어섰다.


약간 설레기도 했었을 거다.

버거를 한 입 베어 물면서 자연스레 바르셀로나 생활에 대해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허물어진 마음에 바르셀로나가 좋기도 하지만 조금 힘들기도 하다고 해실이는 말했다.

인종 차별은 늘상 있고, 아시아 여성에 대한 차별은 더욱 심하다고.

"그래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좋지 않을까? 나도 힘든 점이 있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해."

라는 그 친구의 말에

잠시 허물어졌던 마음의 틈이 빠르게 메꿔져 버렸다.

악의가 없는 그 긍정이 너무나도 순수하게 마음에 박혀버린 순간,

해실이는 더 이상 해실이가 아니게 되었다.


기차에서 모르는 남자가 귓가에 속삭이던 "아리가또 고자이마스",

길을 걸으면 늘 듣던 할아버지들의 우렁찬 "니하오",

굳이 차문을 내려가면서 하던 욕설,

말 못하는 어설픈 관광객인 줄 알고 위조지폐로 바꿔 치려 한 츄러스 집,

바게트 사러 가던 길거리에서 따라오면서 자위하던 어떤 남자,

친구와 함께 놀러 간 클럽에서 힘으로 낚아채진 포니테일,

술집에서 눈을 찢으며 욕하던 여자에게 왜 참지 못하고 똑같이 욕했냐고 한 어떤 친구,


더 이상 긍정의 힘으로 참지 못하고

욕으로 대응하게 된 자신이 부끄러워진,

한 동양인 여자로 남을 뿐이었으니까.


그래서 아마 우리가 안됐을 거야.

순수하게 좋아하던 네 마음이 아니라,

일본 야동을 보고 황열병을 앓던 다른 사람들이 떠올랐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