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바르셀로나, 서울, 파리. 당신의 지갑은 누구에게 맡기시겠습니까?
당신의 지갑은 누구에게 맡기시겠습니까?
#1. 파리의 소매치기
주 스탯: DEX
(STR(힘): 0 / DEX(민첩성): 7 / INT(지력): 1 / LUK(운): 2
사람이 붐비다 못해 꽉 차 있어 움직이지 못하는 트램, 누군가가 나의 패딩을 어루어 만진다.
눈이 마주친 건 40대 추정의 여자. 꽉 채웠던 패딩 주머니 지퍼는 어느새 반이 내려가 있다.
빙그레 웃으며 지퍼를 다시 채운다. 이에 화답하듯 그녀는 손을 다시 꿈틀대며 지퍼를 반쯤 내린다.
오늘 그녀의 민첩성은 나쁘지 않고, 트램의 혼잡도도 그녀의 운이 아예 없지 않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운이 높지는 않아서였을까, 어느새 트램은 멈췄고,
열린 문 사이로 패딩 주머니는 꽉 닫힌 채 유유히 떠나간다.
하지만 그 여자가 허벅지를 비비적대던 손길이 기억나며, 묘하게 기분이 나쁘다.
#2. 바르셀로나의 날치기
주 스탯: STR
STR(힘): 6 / DEX(민첩성): 2 / INT(지력): 0 / LUK(운): 2
아직 동이 채 트지 않은 이른 아침, 인적이 없는 가운데 동양인 여자 둘이 휴대폰 지도를 보면서 걸어간다.
아주 좋은 타겟이다. 라고 생각한 한 남자는 어슬렁 걸어가다가 힘으로 휴대폰을 낚아챈다.
남자의 힘 능력치는 높다. 하지만 이 남자, 운이 그렇게 높지는 않다.
하필이면 상대는 보기보다 꽤나 힘이 세다. 절대 안 뺏기겠다는 눈빛으로 남자에게 스페인어로 욕을 한다.
이건 텄다고 생각했는지 남자가 물러선다. 그러고선 왜 욕을 하냐고 묻는다.
터무니없는 물음에, "네가 방금 훔치려고 했잖아!"라는 악에 받쳐 소리친다.
남자는 "아닌데?"라고 받아친다.
아침부터 시끄러운 욕지거리에 근처 아파트 주민이 창문을 열고 조용히 하라고 한다.
도난 시도 현장은 그렇게 마무리되고, 해가 점차 거리를 비춘다.
그 남자 뒤통수를 한 대 치고 싶은 마음을 애써 씩씩거리면서 참는다.
#3. 서울, 자신과의 싸움
주 스탯: LUK
STR(힘): 0 / DEX(민첩성): 2 / INT(지력): 0 / LUK(운): 8
카페에서 자리를 맡기 위해 노트북을 먼저 테이블 위에 올려둔다. 신형 맥북이다.
잠시 주문을 하고 온 사이, 맥북이 보이지 않는다. 한 차례의 의심도 없이 가방을 다시 뒤적인다.
가방에 다시 넣었던 걸 깜빡했던 모양이다.
여기서는 본인의 정신머리가 진짜 주범임을 새삼 깨닫는다.
물론, 자전거는 예외다.
번외편. 오렌지의 반격 - LUK이 0일 때
STR(힘): 2 / DEX(민첩성): 3 / INT(지력): 5 / LUK(운): 0
방금 공항에서 왔는지, 한 동양인 여자가 가방을 멘 채 캐리어를 끌고 간다.
참 어설프다. 캐리어를 꽉 쥐고 가면 뭐하나, 가방은 무방비 상태인데.
여자가 뒤를 돌아봤을 때 이미 가방은 활짝 열려 있었다. 열린 가방 틈 사이로 귀중품이 보이지 않는다.
그때 그 여자를 지나치는 한 여자, "Sorry."라는 말을 남긴 채 빠른 걸음을 한다.
동양인 여자는 빙그레 웃는다.
그 가방에는 귀중품이 하나도 없다. 왜냐하면 하나도 넣어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대신 아침에 공항에서 오면서 유난히 먹고 싶었던 오렌지 15개로 가방을 가득 채웠다.
소매치기가 느꼈을 허망함을 상상하면서, 여자는 낄낄대며 오렌지를 까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