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클렛, 월남쌈, 마라샹궈의 공통점

#20 파리, 손님이 아닌 식구가 되는 법

by 들숨날숨

파리에게,

안녕 파리,

내가 너를 떠올리면 생각나는 음식들이 있어. 너는 그것들을 정통이 아니라고 얘기할 수도 있어. 아마 우리가 이구동성 게임을 하면 꼴찌를 할 거야. 파리의 대표 음식!이라고 하면 너는 바게트나 오리 콩피를 이야기하고, 나는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답을 내놓을 거야. 우리는 계속 틀리겠지만 무엇보다 먼저 생각나는 걸 어떡하겠어. 바게트도, 오리 콩피도, 와인도 맛있었지만 음식만큼은 솔직해지고 싶어.


나는 널 생각하면
스위스의 라끌렛이, 베트남의 월남쌈이, 중국의 마라샹궈가 생각나.

라클렛(Wikimedia)


라클렛(Raclette)은 겉은 바삭하지만 속은 촉촉하게 녹아내리는 치즈가 하몽, 프로슈토와 함께 짭짜름하고 고소하게 입을 감싸다가, 포슬포슬한 감자나 담백한 바게트가 중심을 잡아주지.





월남쌈(Wikimedia)


월남쌈은 쫄깃쫄깃한 라이스페이퍼 사이로 상큼한 채소와 달콤한 과일, 그리고 식감을 풍부하게 하는 고기가 해선장이나 칠리소스와 함께 달짝지근하게 터지고,





마라샹궈(Wikimedia)


마라샹궈는 아삭아삭한 채소와 콤콤한 양고기 끝에 알싸한 마라의 끝 맛이 살짝 텁텁하게 입에 남아. 그 처음과 끝을 약간의 고수가 깔끔하게 정리해줘서 무한 반복으로 먹을 수 있어.








파리, 우린 돈이 없었어. 그래도 맛있는 걸 먹고 싶었지.

그런데 어느 날 집으로 초대를 받았어. 월남쌈을 먹자고 하더라고.

그래. 우리는 서울의 손님이라기보다는 파리의 식구였어.

바로 초대받은 집으로 직행하기보다는, 마트에서 5.99유로의 보르도 와인을 사고 각자 취향껏 곁들여 먹고 싶은 채소와 디저트를 샀어. 집에 도착했을 때 서울처럼 짜잔! 배달 음식이 기다리고 있거나 누군가 다 요리해놓은 음식이 있진 않았어. 누가 먼저랄 새도 없이 재료를 하나씩 꺼내어 씻고 손질했지. 차곡차곡 음식 준비는 완료가 됐고, 우리는 천천히 라이스페이퍼를 따뜻한 물에 불렸어. 늘어난 라이스페이퍼 위 각자 입맛에 맞게 재료와 소스를 올려 입에 넣었지. 배를 한 아름 한 아름 채우면서 킬킬댔어.


우리는 그렇게 월남쌈 다음에는 마라샹궈를, 그다음에는 라클렛을 해 먹었어. 이전 집주인이 놓고 간 라클렛 그릴을 찾았다는 소식에 얼마나 기뻤던지. 월남쌈, 마라샹궈, 라클렛 재료들은 근처 마트에 모두 있었어. 비빔밥을 해 먹는 게 파리에서는 한인 마트를 가야 하는 만큼 더 어려웠으니깐. Monoprix든, Carrefour든 마트에서 각자 취향껏 재료들을 골랐지. 라클렛 치즈와 하몽을 곁들일지, 잠봉을 곁들일지, 초리소를 곁들일지, 프로슈토를 곁들일지, 고민할 필요가 없었어. 그냥 각자 취향껏 골라 같이 먹었고, 더 다양하게, 서로의 맛을 느낄 수 있었지.



전혀 공통점이 없어 보이는 이 음식들은, 우리가 어디서든 저렴하게 구할 수 있었고, 어떻게 해도 맛이 있었고, 같이 먹을 때 더 즐거웠어.

먹는 사이사이 라이스페이퍼를 불리는,
마라에 잠시 습하- 하는,
라끌렛 치즈가 바삭하게 녹을 때까지 기다리는,
살짝 있는 쉼표들은 이야기로 채우기에 너무나도 적합했지.
마라샹궈


서울에서는 완벽한 차림으로 누군가를 초대해야 한다고 생각했어. 또, 요리를 하는 사이 쌓인 쓰레기들의 재활용과 설거지는 오로지 초대하는 자의 몫이었지. 파리에서의 나는 완벽하지 않았고, 누군가를 초대하는 게 부담스러웠어.

라클렛


여유가 없던 내게 누군가 먼저 손을 건넨 식구로서의 초대는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을 얹는 것보다 반가웠어. 완벽하지 않아도 누군가에게 먼저 건넬 수 있는 여유를, 용기를 주었지. 우리의 라클렛, 월남쌈, 마라샹궈는 완벽하지 않아서 더 완벽했어.





내가 제일 좋아하는 벤앤제리스 하프 베이크 아이스크림을 몰래 냉동실에 숨겨둔 걸 찾은 날엔, 그 누구보다 행복했어. 밥 먹고 나른해질 오후 2시쯤, 우리 집으로 가자. 그 회사 메신저 알림은 더할 나위 없이 반가웠어.

그게 바로 파리를 생각하면 라클렛, 월남쌈, 마라샹궈가 떠오르는 이유야.


Bises,

Y, S, 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