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파리의 습관
파리는 낭만적이다. (참)
나는 낭만적이다. (참)
파리에서의 나는 낭만적이다. (거짓)
서울에서 꽤나 낭만적인 사람인 나는 파리와 함께하기엔 낭만적이지 않은 사람이다.
에펠탑, 루브르, 센 강.
듣기만 해도 낭만적이라는 사람들도 있다.
파리지앵들은 센강을 뒤로한 채, 바게트와 와인을 즐기면서 편지를 읽는다.
낭만적이다 너무.
너무 낭만적인 나머지, 그 편지 안의 따뜻했을 말들은 어느새 식어버린 채 와있었다.
며칠 전 모바일 뱅킹의 비밀번호를 바꾼 것에 대한 오프라인 비밀번호는 차가울 정도였다.
센 강은 한강보다 느리게 흐른다.
4G LTE의 시대를 넘어선 5G 초시대에 살던 내게 우편을 기다리는 3일은 벅찼다.
파리에게 3일은 3일이다.
내게 3일은 72시간이고, 4320분이며, 259200초다.
나는 파리에게 259200초를 기다리게 하는 건 너무하다고 했다.
정말 사랑한다면 나를 그렇게 기다리게 할 수 없을 거라고.
파리는 내게 그저 3일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
정말 사랑한다면 그 정도는 기다려줄 수 있지 않냐고.
그렇다. 파리의 공식 연인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퍽 낭만적인 편지들에 길들여져야 했다.
휴대폰 개통 후 PIN 번호가 담긴 편지는 3일 뒤 왔다.
모바일 뱅킹 비밀번호 설정 후 확인용 오프라인 비밀번호가 담긴 편지는 주말을 지나 5일 뒤 왔다.
계좌 개설 후 PIN 번호가 담긴 편지는 보름 뒤 왔다.
3일 뒤 휴대폰 번호를 이용할 수 있었고, 5일 뒤 집세를 낼 수 있었으며, 보름 뒤 계좌를 사용할 수 있었다.
3일 동안 휴대폰은 공기계였고, 5일 동안 집세가 밀려서 집주인에게 연신 미안하다고 했으며, 보름 동안 현금을 지참했다.
그와 헤어지는 것도 낭만적이었다.
카톡으로 이별 통보 후 잠수 타기. 는 통하지 않았다.
헤어지기 두 달 전, 나는 편지를 썼다.
집을 떠날 거야.
휴대폰 번호도 바꿀 거야.
아, 우리 계좌도 정리하자.
그런 내게 우체국은 증인이 되어주었다.
너는 두 달 뒤 파리와 헤어질 수 있어.
파리는 뼈속까지 낭만적이었고, 아날로그 감성의 저 끝이었다.
확고한 낭만의 그에게 온라인은 오프라인의 매개체일 뿐이었다.
그 덕에 시작과 끝이 명쾌한 파리는 여전히 많은 편지들을 받고 보내줄 것이다.
그렇게 흐르는 센 강에 편지를 한 통 더 띄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