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내가 바르셀로나에게 반했던 순간
모두가 말리는 데는 분명 이유가 있다.
하지만 그 많은 사람들 백 명보다 나 자신 한 명을 믿고 싶을 때가 있다.
'얼어 죽겠다.'
그 날은 할로윈이었다.
두 시간인가, 멕시코 친구 집에서 피를 뚝뚝 흘리는 분장을 하고 모두가 클럽으로 가고 있었다.
길을 걷던 냉동인간, 해골 거미, 메두사, 오펀 사이에서 피 흘리는 고양이는 집에 가겠다고 선언했다.
그때 갑자기, 또 유난히 클럽이 내키지 않았고, 갈 이유가 없어졌다.
사람과 동물, 곤충 그리고 죽음 사이의 어딘가에 위치한 내 친구들은 나를 몇 번 붙잡더니 보내주었다.
자정을 넘어간 시간에 구글 지도는 Nit Bus를 갈아타야 집에 도착할 수 있다고 안내했다.
빠세이그 데 그라시아에서 카탈루냐 광장, 카탈루냐 광장에서 사그라다 파밀리아까지.
빠세이그 데 그라시아에서 카탈루냐 광장까지는 금방이었다.
카탈루냐 광장에서 사그라다 파밀리아가 문제였다.
하지만 택시는 선택지에 없었다. 현금도 없었으니까.
버스는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30분 뒤에 온 버스를 반기는 건 그새 꺼진 휴대폰이었다.
혹시나 해서 기사 아저씨께 사그라다 파밀리아까지 가는지를 물어봤다.
분명히 간다고 하셨다.
마음을 놓았고, 버스는 출발했다.
그런데 뭔가 생경한 풍경들이 펼쳐졌다.
어두운 밤눈으로 아무리 창 밖을 쳐다봐도 싸했다.
다시 기사 아저씨께 다가갔다.
아저씨는 나를 딱 보더니 내가 말하기도 전에,
"헷갈렸어. 사그라다 파밀리아 안가 이거는. 여기서 내려줄게."
뭐라고 말할 새도 없이 그렇게 내려졌다.
할로윈 의상은 얇았고, 칼바람이 그 의상 속을 곳곳이 덧대고 있었다.
음. 아무리 봐도 모르는 곳이었다.
그리고 길거리에는 사람이 많지도 않았다.
간헐적으로 보이는 사람을 붙잡고 물어봤다.
"혹시 구글 지도 좀 켜줄 수 있니?"
돌아오는 답은
멋쩍은 웃음과 함께 "No." 다들 자기도 배터리가 꺼져있다는, 데이터가 없다는 말이었다.
서울이 아니라 바르셀로나였다.
정말 마지막 희망이었다.
어떤 아저씨 앞에 섰다. 인상이 푸근한 아저씨, 길가에 남은 마지막 사람이었다.
혹시 길 좀 알려줄 수 있냐고 물었다.
어딜 가냐고 물어서, 집 주소를 술술 대 버렸다.
이 무서운 세상에서 어떻게 집 주소를 바로 알려주냐고 할 수도 있지만,
그전에 얼어 죽을 것 같았다.
아저씨는 길을 알려주지 않았다.
택시를 탈 건데 집 앞에 내려주겠다고 했다. 같이 가자고.
머리는 머뭇거렸지만 입은 말해버렸다. 'Gracias'. 고맙다고.
아저씨는 분명 인상이 푸근해 보인다고 혼자 되뇌었고, 택시를 탔다.
택시 안은 어두웠다.
아저씨는 내 이름을 물었다. 그래서 말했다.
아저씨는 주소를 다시 물었다. 그래서 말했다.
아저씨가 남자 친구 있냐고 물었다. 없다고 했다.
아저씨는 번호를 물었다. 말할 수 없었다.
아직 번호를 외우지 못했다고 했다.
아저씨는 왓츠앱이 있냐고 물었다. 있는데 잘 모른다고 했다.
휴대폰이 꺼져서 잘 모르겠다고 했다.
그러더니 아저씨는 가방을 뒤적뒤적거리시더니 버스 이용권(T-10)에 이름과 번호를 적어주셨다.
연락하라고. 밥 먹자고.
집 바로 앞에 내렸고 아저씨가 내 주소를 잊어버리기를 기도했다.
그렇게 집에 들어가니 새벽 4시였다.
'차라리 클럽이나 갈 걸.'
장장 네 시간이 걸렸던 거다.
휴대폰을 충전했고, 버스 이용권을 꺼내 읽었다.
분명 연락을 하면 안될 것 같았다.
모르는 사람이고, 내 이름이랑 집 주소를 아는 사람은 너무 위험했다.
나는 체구도 작은 동양인 여자니까.
그런데 이상하게, 정말 이상하게 연락을 하고 싶었다.
한 시간 고민을 하다가 감을 믿어보기로 했다.
세상에는 위험한 사람들이 많지만, 이 사람은 좋은 사람일 것 같다는 이 감을,
믿고 싶었다.
그래서 왓츠앱으로 연락을 했다.
아저씨는 잘 들어갔냐고 하면서 'Brasseria ~'라고 적힌 레스토랑 이름을 바로 보냈다.
시간 괜찮을 때 오라고.
너무나도 능숙한 장소 선택에 당황했지만 티를 낼 수 없었다.
알겠다고 했고 시간까지 확정되었다.
약속을 잡고 나니 계속 머릿속에서 흐릿하게 맴돌던 말이 분명해졌다.
슈가 대디. 다른 말로는 원조 교제.
다른 사람들 머리에도 똑같은 말이 떠오르는 듯했다.
"모르는 60대 아저씨랑 단둘이서 밥 먹는 거 스페인에서도 이상해."
"위험해. 가지 않는 게 좋을 거 같아. 네 집 주소도 아는 거잖아."
"옐로우 피버(아시아 여성 페티시) 아닐까."
기차에서 내 귓가에 아리가또를 소름 끼치게 속삭였던 남자가 떠올랐다.
클럽에서 내 머리채를 잡아당겼던 남자가 떠올랐다.
그래서 더 가고 싶었다.
이 세상에는 희망이 있다고 믿고 싶었다.
가야 할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누구도 쉽사리 나와 같이 가주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내 머리 한 켠에도 있는 걱정으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기어코 가겠다는 내가 우려스러웠던 건지, 한 친구가 같이 가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역시나 망설이는 건 매 한 가지인 것 같았다.
그 마음을 너무 잘 알아서, 내가 먼저 들어갈 테니 상황을 보고 안 좋으면 바로 연락하겠다고 했다.
약속 시간 8시 30분.
멈칫거리다가 8시 40분이 되었다.
어디냐고 연락이 왔다.
그래서 마음을 먹고 혼자 들어갔다.
나를 반겼다. 아저씨는.
웨이터 옷을 입은 채.
아저씨는 그 레스토랑에서 20년 동안 근무했다고 한다.
아저씨는 메뉴판에 있는, 없는, 모든 먹고 싶은 걸 말하라고 했다.
밖에서 대기하는 친구를 불렀고, 음식들은 정말 맛있었고 또 따뜻했다.
그렇게 아저씨는 슈가 대디가 아닌, 내 스페인 아빠가 되었다.
그저 딸 같은 어린 여자애가 새벽 길거리를 떠도는 게 안돼 보였다고 푸근하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