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사랑 가득한 Moià의 첫날, 스페인 가족의 일상
Moià, 산과 참나무 숲이 어우러진 이 도시는 참으로 평화롭다. 그 평화는 무려 선사시대부터 내려져왔고, 6천 명 남짓한 사람들이 스페인 북동부 카탈루냐주의 이 소도시에 살아간다. 갓 깬 병아리의 샛노란 솜털 가득한 느낌의 햇빛이 비치는 곳, 이곳 Moià(모이아)가 바로 내 친구 리즈의 집이다.
[오전 11시 - 바르셀로나 출발]
바르셀로나 자치 대학교 앞에 선 차에 탔다. 문이 열리더니 빛이 쏟아졌다. 천사가 나타났다. 바로 리즈의 어머니 앙헬(Angel)이다. 앙헬이 운전을 하고, 조수석에는 리즈가 타고 있다. 5분쯤 갔을까, 차가 잠시 섰다. 리즈의 동네 친구 까를로가 남은 뒷좌석에 탔다. 어색함과 환영이 섞인 공기를 담고 차는 가던 길을 붕붕 떠난다.
[정오 12시 - 반찬 가게에서 장보기]
산을 굽이굽이 달리자 호젓한 마을이 펼쳐진다. 까를로를 집 앞에 내려준 뒤, 마을의 한 가게로 들어간다. 스페인에서 처음 보는 반찬 가게다. 리즈와 앙헬은 누구보다도 익숙하게 들어선다. 그러고선 "Hola~" 주인장의 미소와 애정 어린 눈빛. 이건 분명 스페인 특유의 활달함을 넘어선 반가움이다. 서로 안부를 묻고, 리즈는 주인장 딸의 안부까지 묻는다. 주인장은 바로 리즈 친구의 어머니였다. 여기서부터 느껴졌다. "아. 내가 가는 곳곳이 리즈의 삶 그 자체겠구나." 그리고 그날 산 반찬 Fideuá catalana(피데우아 까딸라나)에 반해버렸다. Fideuá는 빠에야에 밥 대신 짧은 면이 들어갔다고 보면 되는데, 그 짭조름한 감칠맛과 샤프란이 면에 잘 배어나 빠에야와는 또 다른 매력이다. 그 위에 뿌려진 레몬과 알리올리 소스는 정말 신의 한 수다. 때로는 상큼하게, 때로는 크리미하게 피데우아의 맛을 풍성하게 해 준다.
[오후 12시 반 - 집 구경과 통 뒷다리 하몬 체험]
온화한 2층 집이 보인다. 들어서니 텔레비전을 보시던 리즈의 아버지가 반겼다. 갈색 줄무늬와 검은 빛깔의 고양이들도 나를 반기는 듯했다. 따뜻한 채도의 오렌지빛과 연노랑색으로 꾸며진 집구석 구석에는 100호가 넘어 보이는 큰 크기의 그림들이 걸려 있었다. 바로 리즈 어머니 앙헬의 작품이었다. 나는 그렇게 리즈가 그림에 소질이 있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집 구경을 하다 보니, 1층 부엌의 돼지 통 뒷다리가 나를 반겼다. 가정집에서는 하몬(*돼지 뒷다리를 염장 건조하여 만든 스페인식 생햄)을 자주 먹기에, 돼지 뒷다리채로 사서 잘라먹는 것이다. 하몬을 사랑하는 마음이 전해졌는지, 리즈 아버지는 하몬 자르는 법을 보여주셨다. 일정한 힘으로 적절한 두께로 설겅설겅 잘라내는 게 핵심이었다. 식당에서 먹는 얇고 쫄깃한 하몬을 상상하면서 잘랐다. 하지만 현실은 두껍고 울퉁불퉁하고 짤똥한 하몬이 손에 들려 있었다. 같은 돼지더라도 어떻게 자르는지에 따라 맛이 천지차이기에, 그날 나는 여태 먹어본 하몬 중에 제일 맛없는 하몬을 먹었다. 하몬 기술자가 따로 있는 이유가 있었다. 물론 숙련된 리즈 아버지의 하몬은 맛있었다.
[오후 3시 - 드라이브]
점심 먹고 부른 배를 통통 칠 즈음, Moià의 하늘은 아주 청명했다. 가우디가 많은 영감을 받았다는 몬세라트(Montserrat)와 이어진 산맥으로 둘러싸여 있는 이 도시는 사실 안개가 아주 자욱하게 끼곤 한다. 하지만 내가 있던 3일간의 하늘은 유독 맑았다. 그리고 앙헬은 이토록 청명한 하늘 아래 마땅히 있어야 할 곳을 보여주었다. 10분 간의 드라이브 후 약간의 등산, 리즈와 앙헬은 아주 익숙한 듯 지름길로 안내했다. 그 끝에 펼쳐진 마을 전경은 아주 소담스러웠고, 리즈와 앙헬을 꼭 닮아있었다. 고즈넉하고 포근한 바람을 입 안 한가득 머금고 있었다.
[오후 8시 - 법대생 친구가 일하는 이탈리안 레스토랑]
반찬가게에서는 리즈 친구의 어머니를 뵐 수 있었다면, 저녁을 먹으러 간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는 리즈 친구를 만날 수 있었다. 리즈 친구 락쉬미는 도톰한 입술에 갈색 립스틱, 피어싱이 아주 잘 어울리는 법대생이었다. 아르바이트 중인 락쉬미와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 음식을 시켰다. 락쉬미가 추천해준 이탈리안 피자는 얇고 쫀득했고, 와인과 잘 어울렸다. 사람들은 점차 많아졌고 후식으로는 큰 기대를 하지 않고 퐁당 오 쇼콜라를 시켰다. 기대 없이 시켰던 퐁당 오 쇼콜라는 베어 물자마자 적절히 쌉싸름하고 달콤한 초콜릿이 따뜻하게 입 안 퍼졌고, 그 레스토랑에서 먹었던 음식 중 최고였다. 다 먹고 집에 걸어가는 길, 술기운을 입은 몇 가지 농담들은 마을에 웃음으로 퍼졌다.
[오후 10시 - 스페인어 자막으로 한국 영화 감상하기]
리즈와 영화 <완벽한 타인>을 스페인어 자막을 띄워놓고 보다가 어느새 잠에 들었다. 베개 머리맡에는 아침 술과 크리스마스가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