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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민 Jun 27. 2022

[39주] 미국이었으면 의료소송각?

네덜란드 출산 당일의 기록

39주 4일


새벽부터 진통이 시작되었다. 전날보다는 강해진 진통이었지만 참을만했다. 오늘 아기를 만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체력을 보충하기 위해 잠을 자려고 노력했지만 전날과 마찬가지였다. 화장실을 수시로 들락거렸다. 


그렇게 오전까지 호흡법에 의존해 진통을 참아내고 있었다. 너무 일찍 조산사에게 연락하면 괜히 병원에 못 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최대한 집에서 진통을 참아내고 가려고 했다. 


진통이 약 6-7분 간격으로 오기 시작할 때 조산원 동기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너네 이거 어떻게 참아냈니?" 이미 내 앞으로 9명의 동기들이 아기를 먼저 만났기에 모두들 다정하게 "힘내! 할 수 있을 거야", "순산을 바랄게!", "얼른 조산사에게 연락해!" 등 따뜻한 메시지를 보내왔다. 그래, 지금 와서 어쩌겠는가, 이겨내자, 하는 마음가짐으로 버텼다. 

남편이 계속 열심히 버튼을 눌러가며 기록한 진통 주기. 다시 한 번 고마워 ♥

그리고 진통 간격이 5-6분대로 떨어지자 남편은 조산원에 연락했다. 오늘의 당직은 조산사 M이었다. 약 30분 뒤 도착한다고 했다.


"나 진짜 엄살 심한 편이거든? 혹시 M이 왔는데 나 1cm도 안 열렸다고 하면 어떻게 하지?"


그렇게 조바심을 내던 차 조산사 M이 도착했고 보험사에서 일찍이 받은 Kraampaket 박스에서 매트리스 커버를 침대에 깔았다. 첫 내진이었다. 


"오, 벌써 5cm가 열렸어요."


이럴 수가. 생각보다 많이 진행된 상황. 출산 계획서에 작성했던 무통주사(Epidural)는 맞기 어려울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조산사 M은 근처 병원에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다. 


"A 병원에 지금 자리가 있다고 하니 바로 가요."


A 병원은 다행히 36주 차에 방문했던 그 병원이었다. 집에서 가장 가까워서 내심 여기로 가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자리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하지만 그 짧은 이동 거리에도 나는 한 마디 하지 않은 채 조용히 조수석에서 얼른 도착하기만을 바랐다. 


분만실에 도착하니 간호사가 기계를 세팅해 줬다. 아마도 진통의 세기와 아기의 심박수를 측정하는 기계지 않았을까 싶다. 정맥 주사를 오른 손목에 준비하고 나니 의사 F가 분만실로 들어왔다. 그녀도 무통주사는 지금 상황에서는 불가능하고, 대신 웃음 가스(Laughing gas)나 레미펜타닐(remifentanil)로 통증을 경감시킬 수 있다고 했다. 


"둘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하나요?"
"먼저 웃음 가스를 써 보고 안 되면 레미펜타닐을 쓸 수도 있어요."


사실 웃음 가스는 전혀 생각하고 있지도 않던 선택지였다. 조산원 동기 I가 영국에서 첫째 아이를 분만했을 때 웃음 가스를 썼는데 마치 취한 느낌만 들고 통증은 경감이 안 된, 썩 유쾌하지 않은 기억이었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바로 아편계 진통제인 레미펜타닐로 가려니 조금 무서웠던 걸까, 아니면 웃음 가스라는 게 어떤 건지 궁금해서였던 걸까. 어느 쪽이었든 간에 나는 하나로 선택할 수가 없어서 의료진의 조언대로 웃음 가스를 먼저 써 보기로 했다


분만을 촉진하기 위해 조산사는 양수를 터뜨렸다. 느껴 본 적 없는 따뜻한 느낌이었다. 양수가 터지면 모를 수가 없다고 하더니 그 말이 꼭 맞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7cm까지 진행되고 간호사와 조산사가 준비한 웃음 가스를 흡입하기 시작했다. 


"여보, 이거 이상해. 하나도 아픔이 가시지 않아. 나오는 공기가 없어."


남편은 '내뱉지 말고 그걸 삼키래. 힘차게 흡입해 봐.'라며 간호사의 말을 옆에서 읊어 주었다. 호흡 하나하나가 아쉬운 마당이었지만 열심히 흡입해 봤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을 상상하며 공기를 폐 속에 집어넣어보려고 했지만 계속 내뱉어졌다. 진통은 심해지고 웃음 가스는 효과가 없다고 생각이 들자마자 서둘러 조산사와 간호사에게 레미펜타닐을 달라고 했다. 


"레미펜타닐은 의사가 다시 와야 할 수 있어요. 우리 10분만 조금 더 해 봐요. 조금 효과가 늦게 나타나는 걸 수도 있어요."


"강한 여자잖아요(You are a strong woman). 할 수 있어요. "


그래서 조금 더, 조금 더 시간을 끌어 봤지만 호흡만 가빠질 뿐이었다. 그래서 다시 한번 강하게 의사를 불러 달라고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산사와 간호사가 분주하게 움직이더니 식은땀을 흘리던 나에게 이야기했다.


"오, 미안해요. 웃음 가스 공기통 밸브가 완전히 열려 있지 않았네요.
이제 완전히 열렸으니 다시 한번 해 봅시다." 


나는 가끔 스쿠버 다이빙을 한다. 입수하기 전에 꼭 공기 밸브가 다 열려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ABC인데... 병원에서 이런 일을 당하다니... (출처: Pixabay)


너무 어이없었지만 화낼 기운도 없어서 '그래, 지금이라도 효과가 있으면 다행이려니' 생각하며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정말 쉽게 공기가 들어왔고 이윽고 정신이 몽롱해졌다. 


그리고 그제야 조산원 동기 I의 말이 이해가 됐다. 그냥 취한 느낌이었다. 나는 마치 술주정하듯이 외쳤다. 


"레미펜타닐! 의사! 의사를 불러 줘! 이건 전혀 효과가 없어! 내가 이거 효과 없다고 이야기했잖아!" 


거의 울다시피 하면서 외치자 그제야 조산사와 간호사는 웃음 가스를 끄고 치웠다. 조산사 M은 내진을 하더니 '벌써 9.5cm가 열렸다'며 의사를 부르는 대신 한 번 힘주기를 해 보자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아, 이제 거의 끝나가는구나. 조금만 힘내자. 힘주기는 머릿속으로 수십 번도 더 시뮬레이션해 본 거잖아'라며 다시 한번 심기일전했다. 


진통이 밀려오자 숨을 참고 아래로 힘을 주는데 조산사는 그런 나를 가만히 쳐다볼 뿐이었다. 유튜브에서 보니까 의사들이 힘을 줘라, 빼라 등 지시를 해 주던데? 나는 조산사 M에게 힘주는 걸 조금 도와달라고 했다. 언제 힘을 주고 빼야 할지 모르겠다, 라고 이야기했다. 


"느낌대로 힘을 줘 봐요. 할 수 있어요." 


어...


정말 미리 공부하고 가서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아주 당황할 뻔했다.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고 나 혼자 이걸 해내야 한다는 생각에 조금 울컥했지만 울면 힘이 더 빠진다고 하니 가까스로 눈물을 참아냈다. 더욱 서러웠던 건 조산사가 나 이외에도 다른 산모도 케어해야 해서 계속 분만실에 있다 나갔다 하는 모습이었다. 진통의 파도가 몰아치는데 조산사는 옆에서 태블릿 PC로 일을 하고 있는 그 모습이 너무 야속했다. 

자, 여기 돌을 하나 더 얹어 줄게. (출처: Pixabay)

몇 번이나 진통과 힘주기를 혼자 반복했을까, 너무 지친 와중에 조산사는 경부가 8cm로 줄어들었다며 이 정도면 레미펜타닐을 맞을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의사를 다시 불렀다. 


그리고 다시 의사 F가 분만실로 들어왔다. 거의 세 시간 만에 다시 만났다. 의사는 그새 다시 9~9.5cm로 진행되었다며 조산사 M과 내 앞에서 어떻게 할지를 갑론을박하고 있었다.


'뭐가 되었든 간에 얼른 조치를 취해줬으면!'  


얼마 뒤, 자궁 수축을 위해 옥시토신을 투여하면서 힘주기를 해 보자고 했다. 아까 조산사와는 다르게 의사 F는 능숙하게 진통 1회를 3번으로 쪼개어 힘주기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Push, push, push, yes, more, more, more!" 


의사 F는 중간중간 머리카락이 보인다느니, 머리가 거의 다 나왔다느니, 마지막 3번째 힘주기만 잘하면 끝나는 거라며 나를 다독였다. 혹시 내가 못 들었을까 봐 남편은 그녀의 말 하나하나를 통역해 나에게 전달해 줬다. 


그리고 약 30분 만에 우리는 그토록 고대하던 우리의 아이, '치즈'를 만날 수 있었다. 


내 몸에 올려진 '치즈'의 따뜻한 몸에 비해 손발은 조금 차가웠다. (출처: Pixabay)

글이 조금 길어졌네요. 다음 편은 '분만 후 3시간,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 쓸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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