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첼 Aug 29. 2022

당신의 뇌는 여전히 객관식에 길들여져 있다

선택은 짧고 인생은 길다

한국 사람들은 답을 고르는 것에 익숙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상호 배타적인 것들 중에서 답을 하나 고르는 것에 익숙하다. 그에 익숙한 나머지 모든 상황을 상호 배타적 선택지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하다. 나도 당연히 예외는 아니다. 한국에서 12년 정규 교육까지 받고 4년제 대학까지 졸업한 (실상은 5년이 걸림) 총 17년의 한국식 교육을 받아왔으니 피해 갈 수 없다.


나는 왜 이런 현상이 교육 때문이라고 생각했을까? 우선 한국 교육이 학생들의 다양성을 존중하기보다는 명문대 진학이라는 일종의 정답을 주고 거기에 맞추도록 학생들을 강요(?) 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 외에 또 중요한 원인으로 객관식 시험이 있지 않을까 싶다. 대학교 때 러시아에서 오래 살다 온 친구가 있었는데 하루는 그 친구가 객관식 시험이 너무 어렵다고 했다.  생전 처음 듣는 얘기라 놀라서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자기는 학교 다니면서 한 번도 보기 중에 답을 고르는 시험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 친구가 학교에서 본 모든 시험이 주관식이었다고 한다. 한국은 입시 과정에서 공정성이 중요하고 누군가의 "주관"이 들어갔다는 것을 용납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대부분의 시험이 객관식이다. (수능은 100%) 객관식 시험과 주관식 시험을 준비하는 방법은 확연히 다르기 때문에 객관식 문제만 풀어온 사람들은 뭔가 다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상호 배타적 정답지에 익숙해져 선택의 어려움에 직면했던 상황에 대해 설명해보고자 한다.

1. 전공 선택

대학교에 지원할 때 나의 가장 큰 고민 중 하나는 전공이었다. 내가 지원한 학교들은 전부 학과별 모집이었기 때문에 반드시 특정 전공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경영학과 vs. 경제학과 vs. 정치외교학과 이 세 개가 늘 고민이었다. 고등학교 때 가장 좋아하는 과목이 경제 (특히 거시 파트)와 세계지리였다. 그래서 경제학과를 갈까 하다가 또 내가 다른 나라 이야기에 관심도 많고 하니 정외과를 가야 하나 싶었다. 경영학과는 뭘 배우는 건지 전혀 감이 안 왔는데 모집 인원도 많고, 경제보다 수학도 덜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세 선택지를 놓고 3학년 내내 고민했다. 내 흥미가 저 세 전공 어딘가에 다 흩어져 있어서 하나를 고르기가 힘들었다. 결국 경영학과를 선택했다. 내가 쌓아온 스펙을 고려했을 때 그나마 젤 유리할 것 같았고 모집인원이 많았기 때문이다. 대학에 가서 공부를 해보니 정말 내 흥미는 저 세 과가 섞여 있는 어디 가운데쯤 있어서 전공 구분으로 정의하기가 힘들었다. 그렇지만 굳이 전공 구분대로, 내 전공만 공부할 필요는 없었다. 각 나라의 문화, 역사, 경제상황, 기업 등에 관심이 있어서 여러 전공의 수업을 들으며 내 지적 욕구를 채워나갔다. 비록 "경영학 전공"으로 졸업장을 받았지만 그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전공과 교양에서 내가 알고 싶은 내용의 수업을 듣고, 또 그 흥미와 관련 있는 각종 프로그램에 참여한 것이 후회 없는 대학 생활에 도움이 되었다.

2. 직무 선택

고등학교에서 대학을 진학할 때 전공에 대해 고민했다면, 취업을 준비할 때는 직무에 대해 피 터지게 고민한다. 특히 취업을 처음 준비하는 2-3학년 때 그 고민이 더 심했던 것 같다. 인사? 재무? 마케팅? 영업? 고등학교 때 전공을 선택했을 때 어려웠던 이유는 전공을 잘 모르기 때문인데, 직무도 마찬가지다. 회사에 가보지 않으면 알기 어려운 것들이다. 결국 전공 선택할 때와 마찬가지로 내가 해온 활동들과 엮어서 비벼볼 만하고 사람도 나름 많이 뽑는다고 들은 해외영업 직무 위주로 준비하고 입사했다. (영업관리, 구매 직무도 지원하긴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자기소개서도 쓰고 면접도 본 것 같다.
회사에 와서 보니 같은 해외영업 직무라도 정말 하는 일이 사람마다 천차만별이다. 심지어 같은 부서라도 앞사람이랑 내가 하는 일이 다르다. 이럴 거면 그냥 "신입사원"으로 뽑지 왜 굳이 나눴나 싶을 정도로 다양한 일을 했다. 영업을 떠올리면 흔히 바이어를 만나 협상하고 이런 것을 떠올리지만 역시 세상사는 딱딱 나눌 수가 없다. 단순 데이터 입력부터 선물 사기, 선물(futures) 주문하기, 손익 관리, 네고하기, 서류 만들기, 마케팅하기, 팀원들 관리하기, 내부 보고하기, 출장 가기,, 나열하자면 끝도 없다. 인사? 재무? 마케팅? 영업? 전부 다 했다 ㅎㅎ

3. 커리어

 내가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는 크게 영업과 지원으로 직무가 구분되어있다. 그러다 보니 나도 내 커리어를 계속 지원과 영업을 구분 지어 생각했다. 영업에 있으면서 나랑 안 맞는 부분에 대한 불만과 스트레스가 계속 쌓였고 결국 지원으로 옮겼다. 지원 부서에 와서 어느 정도 일을 해보니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 것에 대충 감이 왔다. 나는 많은 자료를 수집해서 분석하고 또 새로운 자료로 만드는 것을 좋아하고 잘한다. 이 부분에서는 지원 업무가 잘 맞다고 생각한다. 근데 아무래도 영업 부서 지원이다 보니 내가 주도적으로 일을 하는 느낌은 아니다. 그런 면에서 영업 부서의 업무가 더 맞나 하는 생각도 든다. 나는 영업일까 지원일까 또 최근 몇 달 고민하다가 앞선 두 사례가 떠올랐다. 일단 영업, 지원 자체가 우리 회사만 가지고 있는 구분법일 수도 있다. 그리고 막상 힘들게 선택하고 나면 결과는 예상했던 것과 달랐던 것처럼 또다시 내 눈앞의 선택지가 상호 배타적인 것이라는 착각에 빠질 뻔했다. 이걸 깨달으니 한결 자유로워졌다. 내 커리어를 어떤 틀에 가둘 필요가 없고 내가 잘하는 것, 좋아하는 것을 해나가다 보면 언젠가 그것들이 연결된 나한테 정말 딱 맞는 일을 할 수 있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객관식 시험을 볼 때는 정답을 고르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그에 반해 주관식은 한결 마음이 편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잘 정리하고 그에 대한 나의 생각을 조리 있게 잘 쓰면 되기 때문에 부담이 덜했다. 

지금까지 어떤 중요한 선택을 했던 순간들을 돌아봤을 때 그 선택이 객관식 시험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 같다. 나의 선택이 무조건 정답도 아니고, 또 다른 것을 선택했다 해도 틀린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선택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결국 다 연결되어 있어서 스티브 잡스가 말했던 "connecting the dots"처럼 언젠가는 이어지는 것 같다.

내가 좋아하고 관심 있는 것을 발견했다면 지금 할 수 없는 것이라고 놓지 말자. 또 내가 어떤 것을 잘하는지 계속 촉수를 세워서 하나라도 놓치지 말자. 그렇게 내가 할 수 있는 것부터 차근차근 한다면 그게 또 길을 만들고, 그 길이 곧 내가 될 것이다. 선택은 빠르게 하고 그 후에 더 집중해야 한다.

선택은 선택일 뿐 좋고 나쁨이 없다. 빨리 선택하고 길게 실천에 옮기는 게 결국 나만의 정답을 찾는 길이다.


p.s.

자본소득 vs. 노동소득이라는 내용의 짤을 봤다. (vs 제발 그만! ㅋㅋㅋ) 뭘 고민하는가. 저건 선택의 영역이 아니다. 둘 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작가의 이전글 내가 서울대에 가지 못한 세 가지 이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