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매 심리학. 개인적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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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어쩌다 친한 여자 후배의 카톡 한풀이를 받아주게 되었다. 후배가 얘기하기를, 솔로 생활 1년 차에 끈질긴 친구 꼬임에 넘어가 소개팅을 했는데 다행히 소개받은 남자가 키도 훤칠하고 잘생겼다더라. 심지어 대화 코드마저 잘 맞아 즐겁게 식사와 커피를 함께하고 흥이 올라 가볍게 한잔 술까지 즐겼는데, 결국 귀갓길에 사고가 터져버렸다. 내용인즉슨, 밤 10시 경 술기운이 적당히 오른 소개팅남이 우기고 우겨 결국 후배를 아파트 앞까지 바래다주었는데, 아파트 앞에서 이제 그만 가라며 흔드는 후배의 손을 우악스레 잡은 소개팅남이 억지로 키스를 시전 한 것. 당황한 후배는 남자를 밀쳐버리고 집으로 도망치듯 들어왔다더라.
몇몇 픽업 아티스트나 연애 코치들이 연애 기술에 깊이 없고 자극적인 심리학을 들먹이는 경우가 있다. 또 서가에서 보이는 일부 심리학 책들은 대놓고 썸 타는 이성과 어떻게 더 빠르고 자극적인 스킨십 단계에 들어설 수 있는지를 가르친다. 포털 검색창에 '스킨십'을 입력하면 초등학생부터 직장인까지 이성과 스킨십 진도를 빠르게 빼기 위한 질문과 노하우만 그득하다. 그러나 이들이 이야기하는 연애에는 '나'의 욕망만이 존재할 뿐, 타인에 대한 배려는 전혀 없는 듯하다.
환경 심리학자 로버트 솜머(Robert Sommer)는 사람이 외부의 침입자가 침입하지 못하도록 자신의 신체를 보이지 않는 경계로 둘러 싸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이른바 개인적 공간(Personal Space)이라고 불리는 이 심리학 개념은 미국의 저명한 인류학자인 에드워드 홀(Edward Twitchell Hall, Jr.)에 의해 널리 알려졌다. 홀이 말하길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것이라 생각하는 개인적인 공간을 가지고 있고, 만약 누군가 이 공간의 경계를 침범해 들어오면 위협감과 거부감을 느끼게 된다고 한다. 마치 동물의 영역과 같은 개념이다.
더불어 홀은 이 개인적 공간이 단순히 물리적인 거리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심리적 거리에 기반하는 개념이라고 이야기하며 타인과의 친밀감을 기준으로 4가지 차원으로 분류했다. 첫째, 공적인 공간(Public Space)은 3.6미터 너머의 거리로 연설이나 강연 등이 이루어지는 친밀감 제로의 공간이다. 둘째, 사회적 공간(Social Space)은 1.2~3.6m 사이의 거리로 사무적 관계가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셋째, 개인적 공간(Personal Space)은 46cm~1.2m 사이의 친한 친구와 대화할 때의 거리에 해당한다. 넷째, 친밀한 공간(Intimate Space)은 46cm 이내의 거리로 연인 간의 자연스러운 스킨십 혹은 부모와 자식 간의 스킨십이 이루어질 수 있는 공간이다.
친밀한 공간의 거리는 46cm 안쪽, 개인적 공간의 거리는 46cm~1.2m 사이다. 그리고 우리가 일상에서 타인으로 인해 겪는 불쾌감과 거부감의 상당수는 이 친밀한 공간과 개인적 공간에 원치 않는 타인이 들어옴으로 인해 발생하게 된다. 출근길 만원 버스 안에서 예민한 사람들, 승객이 꽉 찬 엘리베이터 구석에서 팔짱을 끼고 경계하며 층 수만 올려다 보는 사람, 한산한 지하철에서 빈자리를 두고 굳이 구석진 자리에 서둘러 앉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런 경우다.
한편으로 자신의 개인적 공간만을 생각하고 타인의 개인적 공간을 무시하는 사람들의 모습 역시 발견할 수 있다. 승객이 가득 찬 버스에서 옆자리에 태연히 명품 가방을 올린 채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 아가씨, 지하철 문이 열림과 동시에 하차하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는 아주머니, 가득 찬 지하철 좌석 사이에서 다리를 쩍 벌리고 숙면을 취하는 아저씨 같이 타인의 개인적 공간을 무시하는 사례를 볼 때 우리는 기분이 몹시 불쾌해진다.
연애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연인 사이도 그렇거니와 심지어 아직 연인이 아니라면 아무리 서로 호감이 있더라도 더더욱 서로 배려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나의 욕망과 거리감만으로 상대의 공간을 무시하고 다가서는 것은 연애가 아닌 폭력이다.
불가근 불가원 [不可近不可遠]
불가근 불가원,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은 관계를 말하며 관계의 적정선에 대한 해묵은 고사성어다. 하지만 썸에 이토록 어울리는 말도 없을 것 같다. 1.2m 내외의 공간을 무리하게 넘는 순간 관계의 적정선은 무너져버린다. 나는 연애에 대해서 잘은 모르지만 어쩐지 두 가지는 알 것 같다. 진정 호감 있는 이성이라면 단순히 물리적인 거리를 좁히는 것은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상대방과 더 가까운 거리로 다가서기 위해서는 그 혹은 그녀의 공간을 존중하고 배려해야 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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