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숨숨 Apr 17. 2024

K-POP 산업 종사자의 '탈엔터' 여정기

나를 잃어버린다는 느낌이 든다면 떠나야 할 때


감사함은 사라지고 괴로움만 남아버린 마음속

K-POP 기획사에서 첫 사회생활을 시작한 나는 초반에만 해도 분명 기쁘고 감사한 일이 더 많았다. 놀 때나 보던 콘텐츠를 돈 받으면서 보고 만드는 게 일이라니. 비록 업무 강도에 비해 받는 돈은 적었지만 나를 스스로 먹여 살리는 경제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에 참으로 감사하고 행복했다.


그러나 역시 불변의 진리,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시간이 지나 환경에 익숙해지자 감사함은 점차 사라졌고 그 자리엔 불만이 피어났다. 자꾸만 이 회사의 부족한 부분, 문제점을 찾아 비판하기 바쁜 사람이 되어갔다.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잊는 건 참 쉬웠다. 갓 입사해 반짝반짝한 눈으로 즐겁게 일하던 나는 온데간데없고 동공에 초점을 잃은 채 출퇴근길에 오르고 그동안 해온 방식을 기계적으로 반복하며 일을 쳐내기만 하는 내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회의감 혹은 불만 가득한 마음으로 퇴근하는 날들이 늘었다.


나 좋자고 부탁하는 일이 아닌데, 왜 이 사람은 이렇게 비협조적이지?

퇴근시간이 한참 지났는데 난 왜 퇴근도 못하고 대기조처럼 있어야 하는 거지?

주말에 일 부탁할 거면 최소한 미안하다는 말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이렇게 애쓰고 힘써서 결국 나한테 좋은 게 뭐지?


머릿속은 날 선 생각들로 가득했다. 불만족스럽고 지친 상태가 매일의 기본값이 되니 주변 누군가에게 친절을 베풀어야겠다는 마음은 사치였고 나 하나 건사하기도 벅찼다.


처음엔 분명 즐거운 날들이 많았는데 어쩌다 이렇게 괴로움에 허우적거리게 된 걸까?


K-POP 기획사에서 일하는 것의 특권 중 하나는 아무에게나 허락되지 않는 화려한 무대 뒷모습을 생생하게 보고 경험할 수 있다는 점이라 생각했다. 일하면서 힘든 시간이 있어도 여기서 오는 재미를 보상처럼 여기며 버티는 날도 많았다. 그런데 이것의 유통기한이 끝나버렸다. 더 이상 그런 비하인드를 보는 게 재밌지 않았다. 그냥 회사 밖에서 실실 웃으며 K-POP 콘텐츠를 가볍게 소비하던 한 명의 소비자로 돌아가고 싶었다. 사실 이 특권은 애초에 내가 원한 것도 아니었고 우연히 얻은 재미였을 뿐이니 시간이 지나 힘을 잃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또 사회초년생에게 일을 주면 얼마나 큰 일을 맡기겠냐만은, 내가 맡은 업무의 대부분은 외부 업체에도 충분히 맡길 수 있는, 정말 작디작은 역할이었다. 그러니 일을 하면서도 내가 지금 하는 일의 의미가 뭔지 전혀 알 수 없었고 장기적으로 커리어에 도움 될 것처럼 보이는 일은 너무나도 적었다. 나여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방법만 알고 익숙해지면 누구든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이곳에 내가 필요한 이유, 내가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를 증명할 수 없으니 타인을 경쟁 상대로 보게 되고 평일의 긴장도도 높아졌다. 남들은 한창 커리어를 확장시킬 시기인데 난 계속해서 커리어가 쪼그라드는 느낌이었다. 더 이상 내가 여기 있어야 할 이유를 찾기 어려웠다.



회사에서 나를 잃어간다는 느낌

그중에서도 이곳을 떠나야겠다는 마음에 결정적인 방아쇠를 당긴 건 본래의 나를 잃어버리게 만드는 업무 환경이었다. 앞선 글에서도 얘기했지만 K-POP 시장은 변화가 잦고, 빠르고, 기민한 팬덤들의 반응과 각종 문제 상황에 대응할 일이 많기 때문에 많은 날들을 대기조 상태로 보내야 했다. 회사의 주요 앨범이 발매되는 날이면 발매일 전, 후로 앨범 프로모션이 한창 진행되는데 이 시기는  평일, 주말 할 것 없이 업무 연락이 오면 바로 일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그리고 이 환경이 나를 가장 무력하고 지치게 만들었다. 한 번은 오랜만에 소개팅을 하는 날, 혹시라도 중간에 업무 연락이 올까 봐 불안한 마음에 소개팅 자리에도 노트북을 들고 간 적이 있다. 식사 중 노트북을 펼쳐 일하는 상황까지는 다행히 벌어지지 않았지만.


오랜만에 본가에 방문해 가족들과 모여 앉아 식사를 하려 해도 예상치 못하게 업무 연락이 오면 숟가락을 내려놓고 노트북 앞에 앉아야 했다. 부모님은 늘 안타까운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며 ‘요즘도 일 많지? 이번 주말도 일해야 해?’를 인사말처럼 건넸다. 주말에 친구와 오랜만에 떠난 여행에서도 갑작스레 오는 업무 연락을 무시하지 못하고 결국 또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노트북을 켜 대응해야 했다. 내 마음속 소중한 공간을 회사에 희생당하고 침해받는 기분이었다.


힘든 업무 환경에 있으니만큼 긍정적인 에너지보단 부정적인 에너지를 내뿜는 사람들도 많았다. 부서 이기주의는 말할 것도 없고 아주 조금이라도 본인의 심기를 건드린다 싶으면 초면인 사람에게 냅다 전화를 걸어와 '너 그렇게 하지 마'라며 훈수를 두는 사람도 있었다. 많은 회사들이 그렇겠지만, 사람들이 모이면 대부분 남을 험담하거나 불평, 불만을 늘어놓거나 회사에 떠도는 가십거리를 얘기하는데 언제부턴간 이런 것들을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길 수 없었다. 비관적이고 회의감이 지배적인 이곳의 분위기가 점점 견디기 어려웠다.


그래도 돈은 벌어야 하니까, 힘든 일이 있으면 동료들과 욕하며 풀고 가끔은 해외여행에 큰돈을 써대며 잠시 기운을 회복하고 그렇게 1, 2년을 견뎠다. 그러다 어느새 차리고 보니 과거에 내가 싫어했던 사람들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었다. 남들에 대해 안 좋은 얘기를 습관처럼 하고 회사에 대한 불만을 입에 달고 사는 부정적인 인간이 되어있었다.


원래 난 이런 사람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어쩌다 이렇게 돼버렸지?



K-POP 시장은 나와 맞지 않아

변화무쌍하고 트렌디한 K-POP 산업을 대하기엔 내가 너무 진지하고 따분한 인간인 것도 같았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과 나는 너무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여기서 진짜 내 모습을 드러내버린다면 난 더 이상 이곳에 속할 수 없는 사람이 돼버리는 것 같아 안 그런 척하려고도 했다. 고작 일 때문에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가고 있다는 느낌, 정확히는 내 손으로 나를 지워가는 느낌이 슬프고 절망적이었다. 이직을 위해 받은 커리어 상담에서도 나를 잃어가는 느낌이 든다면 퇴사하는 게 맞다는 조언을 듣기도 했다.


그래서 이곳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아니 정확히는 '탈엔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탈엔터란 말 그대로 엔터 산업, 정확히는 K-POP 시장을 떠난다는 뜻이다. 이곳을 영영 떠나 다시는 K-POP 시장에 돌아오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행하는 것. 지금 있는 이곳이 내게 맞지 않는단 결론을 내렸고 무엇보다도 날 잃어가는 이 상황을 내버려 둘 수 없었다. 내겐 주어진 인생을 더 좋은 방향으로 꾸려나갈 책임이 있었다.


이직에 대한 결심이 선 후로는 퇴근 후 집에 오면 구인구직 사이트에 들어가 경력직 채용 공고를 샅샅이 찾고 지원하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연봉을 높이겠다거나 막연히 더 좋은 회사로 옮기겠다는 마음보단 그저 살기 위한 몸부림에 더 가까웠던 것 같다. ‘탈엔터’ 하겠다고 결심한 만큼, K-POP 기획사나 음악 유통사의 공고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지금의 경력을 살려 지원한다면 당연히 이런 곳에 지원서를 넣어야겠지만 그렇게 해서 합격을 한들, 비슷한 삶이 펼쳐질 게 눈에 훤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직접 부딪혀보니 탈엔터는 생각보다 어려웠다. 몸담고 있던 산업을 아예 바꿔 이직한다는 게 꽤나 큰 장벽이었다. 엔터 산업은 동전의 양면 같은 특수성이 있었다. 팬덤 비즈니스를 전개하는 콘텐츠 업계에서는 두 팔 벌려 환영하는 분위기지만 그와 관련 없는 산업이라면 별다른 차별점 없는 여러 지원자 중 한 명인 것 같았다. ’팬덤 시장을 벗어나고 싶은, 팬덤 시장과 관련된 경력을 가진 내게 딱 맞는 공고가 과연 있기나 할까?‘하는 마음이었지만 그래도 별 수 없지, 계속 시도하는 수밖에.


핏이 맞지 않아도, 채용공고와 나의 짧은 경력 사이 공통점이 단 1%라도 있으면 일단 지원서를 써내고 봤다. 수많은 불합격을 마주하다가도 가끔은 기적처럼 1차 면접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지만 결국 또 불합격 소식을 들으며 좌절했다.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 내가 한 일이 너무 볼품없는 걸까? 열심히 일했는데 신나게 물경력만 쌓았던 걸까?


거의 1년 넘게 회사를 다니면서 퇴근 후에는 지원-탈락-실망을 경험하는 사이클이 반복되자 이곳을 탈출하는 게 가능하긴 한 건지 의심하게 됐다. 탈엔터는 포기하고 K-POP 시장 안이더라도 일단 다른 회사로 이직하는 것으로 타협해야 할까 고민도 했지만 그건 내가 바란 궁극적인 변화가 아니었기에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 포기를 안 했다기보다 못했다는 게 더 정확하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이직에 성공할 때까지 계속 두드리고 또 두드리며 나와 핏이 가장 잘 맞는 공고가 나올 때까지 지치지 않고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K-POP 기획사에서 일한다는 것의 명과 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