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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숨숨 Aug 15. 2024

이직하면 행복한 거 아니었어요?

좋은 회사도 결국 '회사'라는 사실


K-POP 산업에서 주니어 노동자로 일하며 이 세계를 경험한 지도 3년이 넘었다. 처음에는 새롭고 반짝거리는 것들에 설레는 마음 뿐이었는데 시간이 흘러 환경에 익숙해지자 슬슬 불만이 올라왔다. 더 시간이 지나자 몸도 마음도 탈진해 이곳을 떠나고 싶은 마음밖에 안 남은 지금. 3년을 돌아보면 기억나는 게 대부분 일하는 시간이다. 그만큼 열심히 한 거겠지만 귀한 20대를 이렇게 보냈다 생각하니 꽤 씁쓸하네.


누가 봐도 업무 강도가 높아 힘든 곳이긴 했지만 이상하게 나는 유독 남들보다 더 힘들어하는 것 같았다. 비관적인 목소리가 디폴트로 깔린 분위기, 빠른 업무 속도, 시시각각 바뀌는 트렌드에 민감해야 하는 업무 환경 등 회사의 한 면, 한 면을 뜯어볼수록 내 성향과 반대되는 것들이 많았다. 그 안에서 나는 점점 날서고 예민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서야 알았지만, 나는 혼자 차분하게 앉아 집중하며 일하기를 좋아하고 이왕이면 듣기 좋은 말을 더 많이 하고 듣고 싶으며, 단타로 쳐내는 일이 아니라 긴 호흡으로 일하는 게 더 맞는 사람이었다. 모든 면에서 내 본래 성향과 반대되는 환경에 있던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힘들지.



그러다 결국 인정하기로 했다. 그동안 내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쥐고서는 남들 눈에 화려해 보이고 멋져 보인다는 이유로, 그걸 억지로 입으려 애썼다는 사실을. '이제는 도저히 못 참겠어' 하고 속에서 기어코 터져버린 것이다.


계속 여기 있으면 내가 너무 불행해질 것 같은 절박함이 들었다. 이제 목표는 오직 하나였다. K-POP 산업을 영영 탈출하기. 끝없는 동굴처럼 느껴지는 이곳을 벗어나면 천국이 있을까? 아니 천국은 바라지도 않아, 아주 약간의 희망이라도 갖고 싶었다. 내 미래가 조금이라도 나아질 수 있을 거라는 희망말이야.



환승이직에 성공하려 애쓴 지 1년 반 정도 지났을까. 어느 날은 누가 봐도 좋은 회사라 말하는 대기업에서 경력직 공고가 나왔는데 내 경력을 큰 강점으로 어필할 수 있는 자리였다. 드디어 때가 온 거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재빨리 지원했고 며칠 지나지 않아 돌아온 화요일, 평소처럼 일하던 중 메시지를 받았다. 


축하합니다. 서류 전형에 합격하셨습니다.
다음 전형 일정을 확인해 주세요.


오전이라 사무실은 조용했고 옆자리 동료가 키보드 타자를 타다다닥 치는 소리만 들리던 중이었다.

'와.... 진짜 됐다고?' 


마음속으로는 이미 축배를 들고 온갖 폭죽을 쏘며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지만 이제 서류 합격이니까, 차분한 마음으로 친구에게 온 메시지를 확인한 척하고는 얼른 책상 위에 핸드폰을 덮어 내려놨다.


'나한테도 이런 날이 오는구나. 이번 기회는 절대 놓치지 않을 거야.

열심히 준비해서 보란 듯이 합격하고 말겠어.'




서류 전형에 붙은 날로부터 약 2개월 간 면접을 두 차례 봤다. 기나긴 기다림 끝에 받은 답은 감사하게도, 이번만큼은 불합격이 아닌 합격이었다. 드디어 합격이라니!!


최종 결과 문자를 받았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처음 취업에 성공했을 때도 진짜 기뻤는데 어쩌면 그때보다 더 기쁘고 짜릿했을 거다. 이직 준비를 하며 '엔터사 경력으로 탈엔터를 할 수 있을까, 한다고 해도 얼마나 좋은 회사에 갈 수 있을까'하는 걱정과 두려움이 컸다.


하지만 그간 힘겹게 버텨온 시간에 보상이라도 받듯, 새로 갈 회사는 어느 측면에서 보나 지금보다 훨씬 좋은 대우와 업무 환경을 제공했다.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아는 회사라는 사실에 괜한 위안도 느꼈다. 하게 될 일도 이전에 해오던 일과 완전히 달라 커리어를 여기저기 확장할 수 있는 가능성도 높아 보였다. 무조건 골라야 하는 선택지였다.


이직할 회사에서 연봉 제안을 받은 뒤 지금 다니는 회사에 퇴사 소식을 알렸다. 퇴사일을 정하고 기다리며, 같이 일한 동료들에게 줄 선물을 준비했다. 이 사람들이 없었다면 나는 이때까지 절대 버티지 못했을 거라, 지난 시간에 대한 고마운 마음과 먼저 떠나게 되어 미안한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곧이어 다가온 퇴사일, 쓰던 책상을 정리하고 물품도 반납했다. 동료 몇 명은 고맙게도 이별 편지를 써줬고 그들의 배웅을 받으며 회사 밖으로 나섰다. 이제 다신 여기로 돌아올 일 없겠지. 사직서 쓸 때도 잘 몰랐는데 그제야 퇴사라는 사건이 훅 실감 났다. 3년 반 넘게 나를 참 많이도 괴롭히고 또 성장시킨 회사야, 고마웠다. 근데 다시는 보지 말자.




짧은 휴식을 누리고서 찾아온 새 회사 입사일. 설레고 떨리는 마음으로 판교역에 도착했다. 처음 가본 동네였는다. 하늘 높이 쭉쭉 뻗어있는 고층 빌딩, 그 아래 굉장히 캐주얼한 차림으로 걸어 다니는 사람들의 대비가 재밌었다. 낯설고 새로웠다.


새로운 사람들과 인사하고 업무에 필요한 장비를 건네받고 세팅하다 보니 어느새 오후 7시가 됐다. 손에는 신규 입사자에게 주는 각종 기기와 물품이 한가득. 전에 일하던 회사도 건물은 좋았는데 여기는 더 좋다. 저렴하고 맛있는 구내식당도 있다. 매일 재택도 시켜준다. 같이 일하게 될 조직장과 동료들 모두 좋은 사람들 같았다. 그런데 언제나, 반짝반짝하는 새것이 좋아 보이는 법. 그리고 나중에 깨달았지만 결국 회사라는 존재는 회사로서 갖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더라.



예전에는 먼저 이직에 성공해 떠나는 동료들을 볼 때마다 꼭 물어보고 싶었다.


그래서 이직하니까 행복해?


각자의 이유로 만족하는 사람도 있었고 불만족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도 일단 이곳을 벗어났다는 사실 자체로 그들이 항상 부러웠다. 그런데 이젠 나도 그 질문에 답할 수 있게 된 거다. 너는 어떠니?



정말이지 나는 이직하면 행복할 줄 알았다. 매일같이 괴로움에 몸부림치던 환경을 벗어나 더 나은 곳으로 간 건데 당연히 행복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토록 염증을 느끼던 일과 환경에서 벗어났는데 행복하지 않은 게 이상한 거 아닌가?


연봉도 오르고 복지도 늘고 업무 환경도 좋아졌는데 역시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새 환경에 적응하고 나니 이곳의 장점은 당연해지고 단점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경력직으로 왔으니 이곳에서 내 능력을 증명해 내야 한다는 부담감도 생겼다.


분명 과거보다 나아진 점도 많았지만 결국 '좋은' 회사도 결국 회사였다. 평일 하루 8시간을 고스란히 회사에 묶여있어야 하고 누가 뭐라든 회사가 정했다면 아무리 불만이 있어도 군말 없이 따라야 하는 곳. 하고 싶은 일보다 해야 하고 견뎌야 하는 일이 더 많은 곳


당황스러웠다. 또 속아버린 느낌이었다. 학생 때는 취업만 하면 끝일 줄 알았는데 아니었고, 취업에 성공하니 이직만 하면 끝일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지금 나는 누가 봐도 부러워할 법한 환경에 있는데 왜 마음엔 계속 채워지지 않는 구멍이 있는 기분일까. 이직만으로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은 너무나도 순진했다.


예전에는 일은 많고 보상은 적고, 주먹구구식으로 돌아가는 회사의 환경이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연봉을 올렸고 어느 정도 워라밸을 챙길 수 있으며 복지도 많은 회사로 옮겼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진심으로 행복하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없었다.


그때부터 어쩌면 회사라는 사실 자체가 문제이지 않을까 생각하게 됐다. 그러니까 나는 회사 안에서 행복할 수 없는 사람인 건 아닐까? 매일 아침 새로운 하루를 맞이할 수 있다는 사실에 두근두근하며 눈뜨고 싶었고 내 재능을 살리고 성향에 맞는 일을 하며 살아가고 싶었다. 내가 일하는 장소와 시간을 스스로 정하고 싶었다.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일이 아니라 뿌듯함과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이걸 다 이루려면 회사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결론에 닿았다. 예전부터 어렴풋이 프리랜서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근거 없는 목소리가 아니었구나.


이제 목표는 더 이상 이직이 아니었다. 더 좋은 회사로 가고 싶다는 욕망은 사라졌고 그 자리에 독립이란 단어가 조금씩 움트고 있었다. 회사 밖에서도 스스로를 먹여 살릴 수 있는 독립적인 존재가 되고 싶다는 마음.


그래, 시간이 걸리더라도 해낼 것이다. 이 마음을 모른 척하지 않을 거야.

그러려면 뭐부터 시작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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