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이야기 <끝나지 않는 노란 복도, 백룸>
* 웹 매거진 LiiS에 기고 중인 아티클입니다. 원문은 LiiS 웹 사이트에서 확인 가능합니다.
기묘함에는 사건보다 공간의 힘이 압도적으로 강한 경우가 있다. 오늘의 이야깃거리인 ‘백룸(Backrooms)’이 바로 그런 곳이다.
누군가가 지어낸 이야기지만 실제보다 더 실재같은 세계. 백룸은 어색하게 느껴질 만큼 평범한 공간에서 출발한다. 텅 빈 복도에 깔린 누렇게 바랜 카펫과 어디서 나는 건지 알 수 없는 정체 모를 전기 소음. 처음 보는 장소인데 어딘가 친숙한 건 왜일까. 아무도 없지만 갑자기 누가 튀어나올 것 같기도 하다. 그중에서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게 가장 섬뜩하다. 적어도 지금은.
이름 그대로 백룸은 상점 뒤편에 있는 창고를 뜻하지만, 밈의 세계에서는 훨씬 더 복잡하고 광범위한 개념이다. 시작은 2019년, 한 익명의 유저가 4chan에 올린 사진 한 장이었다. ‘현실에서 잘못 떨어지면 들어가게 되는 곳’이라는 설명과 함께. 누군가 그 설명에 이야기를 보탰고, 또 누군가 레벨 구조와 괴생명체 설정을 얹으며 하나의 거대한 세계관이 만들어졌다. 인터넷이 집단으로 기묘함을 창작한 셈이다.
백룸을 다룬 콘텐츠는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디지털 호러 장르의 영상 콘텐츠, 또 하나는 위키를 기반으로 한 세계관 구축이다. 특히 유튜브 채널[Kane Pixels]의 영상은 백룸이라는 콘셉트를 본격적인 영상 서사로 발전시킨 대표적인 사례다. 영상 <The Backrooms(Found Footage)> 는 1990년대 캠코더 화질을 흉내 내며, 한 소년이 우연히 백룸에 들어가는 과정을 담는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복도와 벽, 그 안을 어슬렁거리는 괴물 엔티티, 어쩐지 수학적으로 설계된 듯한 미로 구조, 들릴 듯 말 듯한 기계음에서 오는 공포가 있다.
촘촘하게 설계된 세계관이 궁금하다면 위키 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앞서 말한 끝없는 복도는 고작 레벨 0이다. 레벨이 거듭될수록 점차 환경이 열악해지고, 때로는 비교적 안전한 공간이 등장해 잠시 숨을 돌리게 해준다. 동화 속 마을 같은 방(레벨94 Motion)이 나오는가 하면 물로 가득 찬 음산한 방(레벨37 Sublimity)도 있다.
특이한 건 이 모든 설정이 특정한 스토리를 강요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백룸은 단선적인 플롯보다 분위기 자체가 하나의 이야기 역할을 한다. 공간이 사건보다 강한 장르, 백룸은 그걸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다.
백룸이 이토록 많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건 무섭기 때문이 아니다. 그 안에는 기억의 조각이 숨어 있다. 유치원 화장실에서 맡았던 특유의 세제 냄새라든가 어릴 때 갔던 병원 대기실의 쨍한 형광등 불빛 같은 감각적 기억들이 백룸의 설정과 겹칠 때 사람들은 묘한 불안감과 동시에 알 수 없는 향수를 느낀다.
그 친숙하면서 낯선 감정이 백룸을 그냥 웃고 즐기는 밈이 아니라 현대판 도시 전설로 만들었다. 상업적 콘텐츠로 진화하고 있음에도 여전히 사람들은 백룸에 새로운 방을 만들고 새로운 규칙을 추가하고 그 안에서의 생존과 탈출을 상상한다.
‘Escape the Backrooms’, ‘Inside the Backrooms’처럼 여러 명이 함께 탈출을 시도하는 인디 게임이 꾸준히 출시되고 있다. 스팀에서 구매할 수 있고 리뷰도 꽤 좋다. 백룸의 미로를 직접 걸어보고 싶다면 한번 해볼 만하다.
백룸이라는 콘텐츠를 따라가다 보면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마주하게 된다. 기묘한 감정은 혼자서 느낄 때 가장 강렬하지만, 누군가와 나누면 훨씬 오래 살아남는다는 것. 그래서 사람들은 커뮤니티에 글을 남기며 댓글을 주고받고, 2차 창작으로 자신만의 방을 만들며 이 세계를 계속 넓혀간다.
사건과 인물보다 공간이 우선인 세계. 그 안에서는 누구나 자신만의 이야기를 지을 수 있다. 정해진 플롯이 없으니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백룸은 끝나지 않는다. 방을 만드는 사람이 있는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