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틋함을 만나다
시즈쿠는 ‘내가 떠올릴 수 있는 청소년기의 가장 이상적'인 캐릭터이다. 책을 좋아하는 시즈쿠를 볼 때마다, 내 청소년기가 떠오른다. 더불어, 그 시절 내가 해 보지 못한 혹은 생각지 못했던 걸 떠올리게 된다. 이런 이유로 일본 애니, ‘귀를 기울이면'은 항상 내게 애틋함과 추억을 생각나게 해 준다. 누구나 과거로의 여행을 가능하게 하는 수단이 하나쯤 있지 않나?
시즈쿠의 십 대가 특별함을 더하게 된 건, 자신만큼 책을 많이 읽는 아마사와 세이지를 알게 된 일이었다. 도서관을 들락날락하는 시즈쿠는 늘 본인보다 앞서서, 책을 읽은 사람에게 감탄하면서 궁금해했다.
난 고등학교 시절에 많은 책을 읽었다. 시즈쿠만큼 늘 책을 끼고 살았고, 밤샘도 자주 했다. 자습시간에도 교과서 안에 개인 도서를 펼쳐놓고 읽었다. 그런데 당시에도 독서하는 친구들은 많지 않았다. 전교권의 성적을 가진 한 친구는 만화책에 꽂혀 있었다. 그러다 보니, 책을 읽고 대화를 하긴 어려웠다. 나처럼 시즈쿠도 책을 읽고 이야기를 많이 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같은 책을 앞서 읽고 있는 세이지를 만났다. 자기만의 꿈을 좇는 세이지를 본 시즈쿠는, 정말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시도해 보기로 결심하고 실천했다. 한마디로, 시즈쿠는 나보다 더 실천적이고 자기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잘 기울이는 소녀이다.
두 사람을 보니, 빨간 머리 앤이 떠오른다. 앤과 길버트. 요즘 말로 썸 타는 그런 관계라기보다, 내 눈에는 서로에게 좋은 라이벌이자 친구로 보인다. 선의의 경쟁자인 길버트가 존재한 덕분에 앤은 더욱 자기 공부도 열심히 했고 꿈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시즈쿠와 세이지 역시도 서로에게 든든한 친구이자 선의의 경쟁이 가능한 관계가 아닐까.
애니의 제목은 ‘귀를 기울이면'이다. 그동안 스토리에 집중하느라 제목이 왜 ‘귀를 기울이면'인가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니, ‘귀를 기울이면'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또 그렇게 하면 정말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지 발견할 수도 있다, 내 생각 외에도 가까운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도 때론 도움이 된다 등등을 말하려고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일단 귀를 기울이는 일은, 시끄러운 소음이 가득한 세상에서 생각보다 하기 어렵다. 하지만, 시즈쿠와 세이지가 잠시라도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 홀딱 빠져서 시간을 보냈던 것처럼, 그러한 실천이 어쩌면 우리에게도 필요하지 않은가 생각했다.
어른이 된 지금의 나와, 애니 속의 시즈쿠는 여전히 비슷한 부분이 조금 있다. 좋아하는 책을 읽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이제 어떻게 하면 쓰고 싶은 글을 쓸 수 있는지? 시즈쿠는 몇 주간 잠도 덜 자고 시험공부마저 좀 소홀히 하면서까지, 혼자 글을 써 나갔다.
다 쓰고 나서, 세이지의 할아버지를 만나서 보여주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평가를 기다렸다. 자기 글의 최초 독자로부터 글이 재미있는지 없는지에 대해 듣는 일은 얼마나 가슴 조리는 일일지. 정성 어린 격려와 힘을 얻은 시즈쿠는 집에 와서 푹 자고 일어났다. 그렇게 한 단계 나아간 시즈쿠는, 다음날 홀가분한 마음으로 세이지를 만나게 된다.
종종 상상해 본다. 시즈쿠는 세이지가 나중에 결혼하자고 했을 때 좋다고 했다. 그들은 정말 결혼했을까? 앤은 독자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에 힘입어, 빨간 머리 앤 후속 편에서 길버트와 결혼하게 된다. 어쩌면 시즈쿠는 결혼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세이지와 여전히 좋은 친구로, 서로 발전하도록 자극하는 관계로 남았을 수도.
늘 내 청소년기를 상기시켜 주는 시즈쿠와 세이지. 내게도 세이지 같은 친구가 있었다면? 이런 상상도 해 본다. 어른이 되어서도 그런 친구를 만드는 건 어려웠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글을 쓰고 있다. 그 애틋한 기억을 선물해 준 시즈쿠에게, 오늘도 마음속으로 고마움을 전한다.
여러분은 무엇을 보고 어린 시절을 추억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