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의 기억

흐린 날의 바다에서

by 숨은결

-이 글은 쿠르베의 작품을 배경으로 작성했습니다.-


잿빛 구름이 가득한 이런 날이면 내 마음도 덩달아 무겁게 가라앉는다. 비바람이라도 크게 몰아칠 것 같은 날은, 집에 있어야 좋은데, 내 발은 바깥으로 향한다. 우산도 소용없는 날이 될 텐데, 그래도 나는 바다를 보러 간다. 이런 날은 바닷가 모래사장에 앉아서, 곧 몰려올 것 같은 파도를 기다려 보는 것도 큰 즐거움이다.

머지않아 파도가 슬금슬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넘실대는 파도는 한복을 입은 할머니가 덩실덩실 몸을 흔드는 것 같기도 하고 마치 춤추는 무희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 파도를 보고 있으면 겁나지만 저 파도가 내가 앉은 곳까지 밀려올지 궁금해진다. 왜 파도는 저리 험악하게 보이면서도 기다리게 되는 걸까? 하늘을 가득 채운 구름은 점점 더 몰려들고 있다. 더 이상 낄 자리가 없는데도 꾸역꾸역 시장 한쪽에 좌판을 벌이는 할머니들처럼 한 자리 차지하겠다며 아우성이다.

아무도 없는 이런 해안가의 풍경이, 크게 너울거리는 파도보다 더 오금을 저리게 하는 무언가가 있다. 사람들은 모두 따뜻한 난로 옆에 모여 수다를 떨고 있을까? 오늘 같은 날은 안락한 소파에 몸을 맡긴 채, 샬롯 브론테의 빌레트를 읽으면서 간식을 먹는 게 가장 즐거운 일이다. 어서 집에 가야겠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저 어스름이 낮게 깔린 해안가를 자꾸 뒤돌아보는 건 왜일까. 아마도 성난 파도를 품은 잿빛 바다가 걱정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파도 너머, 감정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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