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을 쓰는 사람|프롤로그

감정의 언어를 찾아가는 여정

by 숨은결


좋아하는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고' 말했다. 내가 늘 감정을 멀리하고 뒤로 버려둔 채 지낸 과거의 긴 시간은 혼란의 도가니였다. 호불호가 명확했던 것과 별개로, 감정은 불투명했다. 감정의 단조로움은 심플한 삶으로 인도하기보다, 오히려 감정의 화산 속에 날 밀어 넣는 경우가 많았다.

감정의 바다에서 헤엄치다가 도착한 곳은 책과 연구였다. 늘 내가 선택하는 연구대상 텍스트는 문학작품이었다. 덕분에 작품 속에 나타난 감정은 무엇인지를 파고들 기회가 있었다. 내 예상과 달리 감정에 대한 도서들은 꽤 진중했고 감정 자체도 다양했다. 궁금한 것들은 다시 책으로 돌아갔다.


이해할 수 있는 맥락을 파악하려고 노력했고, 이를 블로그에 틈틈이 기록도 했다. 그러다가, 박사과정 수료 후, 올해 7월에 브런치 작가에 선정되면서 비로소 본격적으로 감정을 내 언어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내게 감정은 추상적인 대상이라서 뜬구름 잡는 격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우회하기로 마음먹었다. 다름 아닌, 예술이라는 매개 다리를 건너는 것으로 결정했다. 문학 다음으로 친숙한 대상이 예술이었다. 그 다리를 건너기 시작하면서 이전과 다른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예술작품에 나타나는 이야기들을 통해 감정을 예측해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림의 배경지식을 바탕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닌, 그림 자체로 접근해서 이야기를 만들고 그를 통한 감정을 경험해 보는 것.

예술작품에서 추상적인 감정을 내 언어로 재해석했다면, 후자의 매체들을 통해 경험한 감정은 좀 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다가왔다. 그 생생한 감정을 언어화하는 것은, 내 자신을 보다 면밀히 들여다보는 일에 맞먹는 일임을 자각할 수 있었다.

허공에 떠 있는 감정을 채로 잡아서 내 손에 놓고 그것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예술작품과 영상매체를 통해 감정을 자세하게 보려고 했다면, 이제 그렇게 알게 된 감정을 언어화하는 일이 중요했다. 뜻하지 않게 내가 평소에 즐겨 학습한 외국어를 통해서 내 감정을 글쓰기로 발전시킬 수 있게 되었다.


언어에는 나라마다의 문화와 사고방식, 그리고 감정이 깃들어 있다. 한국어를 비롯해 일본어, 중국어 등등의 각국의 언어는 그 나라의 고유한 정서가 품고 있다. 그래서 나는 평소 좋아한 단어들을 감정의 관점을 투영해서 관찰한 이야기들을 글로 풀어가고 있다. 이 작업은 꽤 흥미롭다.

단순히 감정을 발견하는 것에서만 그치지 않고, 예술작품과 영상 매체 등에서 보여준 감정의 조각들을 모아서 사유하려고 했다. 이전에는 단순히 어떤 점이 재미있었고 흥미로웠다고 기록하는 수준이었다.

이제는 인물과 사건에서 드러난 이야기들과 그로부터 기인한 감정들의 의미와 메시지, 흘러가는 방향은 어디인지를 고민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내 사유의 영역이 넓어지고 다양한 각도에서 관찰하고 느낀 바를 글쓰기로 전환할 수 있었다.

애초에 감정은 내게서 너무 멀리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려고 하니 벅찼다. 지금도 여전히 어렵기만 하다. 그러나 최근 몇 달간 글쓰기를 통해 감정에 관한 이미지, 생각 등을 전환하면서, 글쓰기라는 행위 자체는 내게 새로운 세상으로 가는 통로가 되었음을 느끼고 있다. 이는 아주 기쁜 자각이고 감사한 일이다. 예상치 못한 브런치 작가 합격이 이후 약 세 달간의 기간에 작은 변화들을 많이 불러왔다.

이후로는 본격적으로 지금 하는 작업을 넓혀가면서, 감정이 더 이상 추상적인 대상이 아닌 일상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내 언어로 번역해 볼 계획이다. 흥미진진한 모험의 시작이다.

이 책은 내가 말할 수 있는 감정들에 대한 기록이자 앞으로의 여정을 비춰줄 작은 지도이기도 하다. 이 여정은 비단 나만의 기록이 아닌, 감정을 어려워해서 멀리하는 이들에게 자신만의 언어로 사유하고 번역하도록 도와줄 수 있는 도구가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