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보존의 법칙

우리는 감정을 간직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불러낸다

by 숨은결


오랜만에 대만드라마 <16개의 여름>을 보다가 다시금 오랜 의문이 생각났다.
다름 아닌, 감정의 보존에 관한 것이다.

이 의문을 가장 먼저 던진 드라마는 미드 <굿와이프>. 이 드라마에서 여주를 로펌에 취직시켜 준 사람은 대학동창 남자친구. (극 중 이름은 생각나지 않지만, 배우는 기억함) 그런데 이 남자는 10년이 넘는 세월에도 불구하고, 여주를 잊지 못하고 있었다. 그 당시에도 드라마를 보면서 여주와 남자의 감정선을 따라가지 못했다.

문득 다시 <16개의 여름>을 보다가, 감정을 보존한다는 건 결국 기억 혹은 추억이라고 부르는 것을 소환하는 행위가 아닌가. 그래서 감정을 불러오면 그 감정에 관련된 장면들이 되돌아와서, 마치 내가 그 감정을 여전히 가지고 있고 느끼고 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하는 데까지 다다랐다.

우리의 기억은 왜곡된다. 온전하게 보존된다고 장담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의 기억이다. 같은 장면에 대해서 사람마다 다른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 비롯된다. 지금도 내 친구와 내가 고3 때 겪은 일에 대한 기억은 서로 상이하다. 아마 나보다 친구의 말이 정확할 것이다. 왜냐하면 난 고3 때 일이 대체로 흐릿하다. 반면 내 친구는 꽤 뚜렷하게 친구들 이름이나 사건을 말하곤 한다.

대드 <16개의 여름>에서는, 특히 팡웨이더가 탕지아니(여주)를 만나고 평소보다 강한 감정을 느낀다고 독백한다. 두 사람은 대학 시절에 서로 좋아했지만 누구도 먼저 고백하지 못한 채 헤어졌기 때문에 미련이 가득하다. 그런 만큼, 기대하지 못했던 재회가 이루어진 후에 그 미련은 감정의 화살로 되돌아오지 않았을까?

같은 감정을 오랜 세월 유지하는 건 어렵다고 생각한다. 단지 같은 강도의 감정은 아닐지라도, 기억 속에 보존된 감정에서 불러와서 새록새록 추억을 되살리는 것이 아닐까 싶다.

내 기억을 꺼내봤다. 특정한 사람에 대해서 호의를 가지고 있었다. 그 사람과 다시 연락이 닿아서, 실제로 대화가 이루어지기 전에 내가 가진 호의, 기분 좋음 등에 대한 장면들이 연결되었다. 그런 후에 실제로 서로 다시 말문을 텄을 때는 그 감정들에 기반해서 즐겁게 대화가 가능했다.

드라마에서는 10년 넘는 시간, 좋아하는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고 나오지만 실제로 그것은 오래된 감정의 방에서 기억을 꺼내서 다시 펼쳐보는 행위로 볼 수 있지 않을까? 그 감정의 방에는 도저히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얽힌 실타래 같은 감정 덩어리들이 많겠지만, 그중에서 망설이지 않고 딱 하나 집어 올릴 수 있는 그런 감정이, 아마도 오랜 세월에도 녹슬지 않은 채 살아있는 감정실타래가 아닐까 생각했다.

감정이라는 건 매우 미묘한 것 같다. 그 실체가 명확하게 보이는 것은 드물지 않나 싶다. 그래서 우리는 정확하게 보기 위해 노력을 기울여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지 않으면 그 미묘하게 얽힌 뭉텅이에서 선명한 한 줄만 콕 집어내긴 어려울 것 같다.

감정 보존의 법칙이란, 감정의 방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그 무게는 크게 줄어들지 않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결코 이전과 같은 구성으로 되어 있지 않는 것으로 정의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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