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토익"의 토는 吐! 에 이어 )
6개월 만에 토익과의 전쟁을 마무리하고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동안 내처 달리던 것이 몸에 배어서인지 갑자기 찾아온 여유가 빌려 입은 옷처럼 어색했다. 무거운 등짐을 내려놓은 것 마냥 홀가분하긴 한데 뭔지 모를 허전함이 들었다.
그동안 공부했던 토익책들을 정리하다가 그 허전함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싸우면서 정든다 했던가? 욕하면서 영어와 정이 들었다. 당초에 필요했던 점수만 챙기고 손을 놓기에는 아쉽기도 하고, 억울한 생각도 들었다. 힘들게 여기까지 왔는데 겨우 점수 하나 얻고 끝내려니 본전 생각이 났다.
이왕 영어에 발을 들여놓았으니 회화를 한 번 해볼까? 친구와 터키에 갔을 때 언어가 되면 여행이 훨씬 더 풍성하겠다는 생각을 했던 게 기억났다. 억지로 시켜서 하는 것도 아니고,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니 예전과 달리 신나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침저녁 혼자 회화 공부를 하다가 적당한 영어 프로그램이 있어서 등록을 했다. 외대에서 진행하는 6개월 코스 프로그램인데 퇴근 후에 3시간씩 1주일에 3일(월, 화, 수) 수업이 있었다. 잘하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기도 못 펴고 출석 도장만 열심히 찍는 것 아닌가 걱정했는데 다행히 해 볼만했다.
크게 기죽지 않고 시작은 했는데 문제는 입이 도통 열리지 않는 거다. 벙어리 냉가슴 앓는 심정이 이런 걸까? 마음은 벌써 원어민과 친구 해먹고도 남았는데 입은 남의 입을 갖다 붙여놨는지 도무지 내 맘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머릿속에 하고 싶은 말은 가득했지만 변비 걸린 말처럼 나올 생각을 않았다. 쩔쩔매면서 또다시 커다란 좌절을 맛보았다. 시작할 때 품었던 의지와 자신감은 약에 쓸래도 없었다. 세상 참! 쉬운 게 하나 없다.
어쨌든 6개월을 버텼다. 그동안 달라진 게 있다면 처음 시작할 때는 단어 한두 개로 의사 표현을 했던 것이 그나마 몇 개의 조합으로 살이 조금 붙고, 짧은 문장 정도 구사하는 게 전부였다. 길게 묘사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고 그러려면 머릿속에서 말을 생각하고 다듬어야 했다.
6개월 과정 이수 후, 다른 평생교육원에서도 강의를 들었지만 말하기 전에 머리에서 생각하는 습관은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영어 전문가들은 머릿속으로 생각하거나, 번역하지 말라고 하지만 내가 안 하겠다고 해서 쉽게 없어지지 않았다. 그 과정 없이는 입 밖으로 말이 나오지 않으니 그렇게라도 해야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도 발전하는 과정이었던 것 같다. 지금은 예전처럼 생각하지 않고도 말이 되지만, 그때는 내 수준이 그 정도밖에 안 되었고, 더 말이 익숙해지면 자연스럽게 벗어날 수 있는 단계인 것 같다.
하고 싶어서 한 선택이지만 늘 재미있지 않았다. 시작만 하면 금방이라도 눈에 띄게 달라질 줄 알았는데 좀처럼 말이 늘지 않았다. 때려치울까? 하는 생각을 말이 콱콱 막힐 때마다 했고, 시도 때도 없이 말이 콱콱 막혔다. 터키 여행을 떠올렸다. 그때의 간절함을 생각하며 하루 30분을 공부하더라도 끊을 놓지 않으려고 했다.
영어로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없다 보니 집에 오면 아들이나, 남편에게 영어로 대화를 하자고 제안했다. 아들은 엄마와 그러는 게 어색하다며 퇴짜를 놓고, 남편은 나보다 더 오랫동안 머리로 생각하는 바람에 나와 레벨(?)이 안 맞아서 내가 퇴짜를 놓았다.
하는 수없이 출퇴근하는 차 안에서나, 아니면 혼자 걸을 때마다 나 혼자 떠벌거렸다. 그러면 마주 오는 사람이 중얼거리는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곤 했는데, 요즘은 코로나로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받을 걱정은 없다. 코로나 덕을 본 사람이 있다면 그중의 나도 한 사람일 것이다.
왼쪽 페이지에서 공부한 단어가 오른쪽에 나오면 그새 까먹고 새로운 단어처럼 생소하게 여겨질 때는 참담했다. 공부하는 것도 다 때가 있었다. 늦으니 더디고 많이 허덕였다. 그래도 느는 것 같지 않아서 느는 줄도 몰랐던 말이 시간이 쌓이고 쌓여 조금씩 늘었다.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은 나아지는 줄 몰랐는데 시작한 처음을 생각하니 어느새 많이 달라져 있었다.
여전히 서툴고 유창하지는 않아도 어쨌든 공부한 덕분에 아시아, 유럽, 남미를 혼자 뽈뽈거리고 다녔다. 뒤돌아 보면 그때 그 토 나오던 토익공부를 시작하지 않았으면 나 혼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까 싶다. 작은 시작이 새로운 도전을 동무처럼 데리고 왔고, 그 도전은 또 새로운 길을 알려주었다.
이만큼 살고 보니 길은 꼭 정해진 길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작은 일탈이 가보지 않은 길의 첫 걸음이 될 수도 있고, 절대라고 설정해 놓은 길에 스스로 얽매일 필요도 없는 것 같다. 단단한 그 생각을 벗고보니 세상은 넓고, 하고 싶은 일들이 더 많이 보이기 시작했다.
( "제대로 토하고 싶다"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