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 제대 후 복학한 오빠는 대학 4학년 어느 날 여자 친구를 인사차 집으로 데리고 왔다. 그렇게 두 사람은 잘 사귀나 보다 했는데 얼마 후 무슨 이유인지 오빠는 여자 친구와 헤어졌다고 했다.
"많이 슬프겠다"
"괜찮아"
"어떻게 괜찮아? 많이 좋아했잖아?"
"많이 좋아했지"
"그런 사람과 헤어졌는데 어떻게 괜찮을 수 있어?"
"그 사람한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으니까"
"그렇게 정성을 들인 사람과 헤어졌으니 더 안타깝지"
"내가 더 이상 할 수 없는 만큼 다 했으니까 미련 없이 헤어질 수 있는 거야......"
"그동안의 시간과 노력이 아깝지 않아?"
"그건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거지. 헤어졌다고 해서 없어지는 건 아니야"
"????????????"
20대 초반이었던 나는 오빠의 말을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토록 온갖 정성을 들이고 최선을 다 한 사람과 헤어졌는데, 그래서 오히려 미련이 없다는 말은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 geralt, 출처 Pixabay
10년 동안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운 남편과 이혼한 친구는 결혼사진을 전부 찢어버렸다. 남편이 있는 다른 사진도 일일이 그 사람이 있는 부분을 도려냈다고 했다.
"왜? 그냥 두지 그랬어?"
"뭐 하게? 사진을 보면 아직도 열받는데"
"그래도 네 인생에서 그 사람과 결혼한 사실이 없어지는 건 아니잖아. 그것도 어쨌든 부인할 수 없는 네 삶의 일 부분인데......"
"일 부분은 무슨 일 부분? 지울 수 있으면 내 인생에서 그 사람을 벅벅 지우고 싶다"
이혼한 지 7년이 지났어도 남편을 떠올리면 아직도 화가 치민다는 친구는 여전히 그 사람과 관계를 끊지 못하고 미움으로 이어져 있었고, 나는 그런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
© lks_bt, 출처 Unsplash
20대 때는 절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던 오빠의 말이 수 십 년이 지나는 동안 어느새 내 안에 들어와 있었다. 삶도 수학공식처럼 얄짤없는 것이라 여겼던 젊은 날의 단호함은 어디 가고, 1+1=2가 아니라 1이 될 수도, 아니면 아무것도 없는 0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터무니없고, 얼토당토않은 이 어긋난 산술 "0"이라는 답 안에,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또 다른 가치가 있는 것도 한참 후에야 알았다. 객관적이지도, 보편타당하지도 않은 그것은 그래서 "0"이어도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었다. 내 손에 남은 것이 없으니 허망한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것으로 채워져 있었다. 단지, 그것을 찾아서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떤 가치를 부여할지는 오빠와 친구처럼 각자의 선택에 달려 있는 것 같다.
다 태우고 나니 미련조차 없어서 오히려 새털처럼 가볍게 헤어질 수 있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반백 년을 넘게 살고 보니 이제야 알 것 같다. 살 날 보다 산 날이 더 많고 새롭게 만나는 일보다 헤어질 일이 더 많이 남았을 내게, 사는 동안 태우고 또 태우고 마저 태울 일만 남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