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도 오래전 일이라 언제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아마도 20년은 더 된 것 같다. 승진을 위해 필수로 이수해야 하는 2주 교육이 있어 동기와 함께 수원을 갔다. 그 당시 교육원에는 기숙사가 충분하지 못해 대부분 교육원 앞에서 하숙을 해야 했다. 다닥다닥 얕은 담장을 맞대고 있는 많은 하숙집 중에 음식 솜씨와 친절함으로 입소문이 난 집을 먼저 선점하는 것이 교육생들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중요한 일이었다.
교육기간 중에 아침저녁으로 맛깔스러운 음식과 일상에서 벗어나 여유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교육은 빡세게 공부를 해야 하는 스트레스를 거뜬히 뛰어넘고도 충분히 할만한 남는 장사였다. 딱히 무엇을 하지 않더라도 육아와 살림, 일에서 잠시 벗어나 오로지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어 학창 시절로 다시 돌아간 것 같았다.
교육원이 수원 끄트머리에 있기도 했지만, 지금처럼 다양한 문화시설이 있던 때도 아니라서 당장 쫓기는 공부가 없으면 일찌감치 저녁을 먹고 마루에 앉아 같은 하숙에 묵고 있는 직원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소일거리 중의 하나였다. 그렇게 하숙집은 오랜만에 만난 직원들과 회포를 푸는 고속도로 휴게소 같은 곳이기도 했다.
예전에 같은 과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 어느 남자 선배도 몇 년 만에 그 하숙에서 만났다. 근무하는 동안 그다지 이야기를 나눌 일이 없어 간단히 인사나 하고 말았는데, 같은 하숙에 묵다 보니 저녁 식사 후 자연스레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생겼다. 모처럼 여유로운 직원들은 삼삼오오 술 약속을 만들어 나가는 경우가 태반인데, 둘 다 술을 좋아하지도 사람 북적대는 곳을 좋아하지도 않다 보니 우리는 짜고 남은 술지게미처럼 하숙집에 처지는 날이 많았다.
처음에는 주인아주머니가 내어주신 찰옥수수를 먹는 동안만 있어야지 하던 것이 옥수수를 다 뜯어먹고도 한참 동안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생각이 다 일치하는 것도, 그를 100% 다 이해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는 이어졌다. 왜 그런가 되짚어보니 서로의 생각은 달랐지만 그것이 틀리다고 누구도 서로를 배척하지 않았다. 나와 다른 생각을 잘못된 것이라 단 한 번도 치부하지 않았으며, 다른 생각은 새롭게 짚어보고 이해해 보려는 시도로 삼았다.
"그렇게도 생각하는군요"
"나는 전혀 그렇게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하겠네요"
대화가 잘 통한다는 의미를 그때 처음 알았다. 자정이 넘도록 다양한 장르의 이야기를 두 사람의 교육기간이 겹치는 1주일 동안 얼굴이 마주치면 나누었다. 나와 다른 생각에 새롭게 눈을 뜨기도 하고, 일치하는 의견에 격하게 공감하며 상대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 인정했다. 나와 다른 생각을 바꾸거나 뒤집으려 하지 않고, 내 것이 옳다고 핏대 세우며 주장하지도 않았으며, 생각의 차이는 그것대로 알아가는 미지의 부분으로 남겨두었다.
이미 오래전에 이혼한 것을 마치 남의 이야기처럼 담담하게 꺼내는 그의 살아온 힘든 여정이 생각을 곰삭게 했을까? 하는 생각도 잠시 들었지만, 사람이 단순히 나이를 먹고, 어려움을 겪는다고 해서 저절로 생각이 커지는 것도 아니니 꼭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 후로 많은 사람들과 접하면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지만 그 선배처럼 서로 다른 생각을 갖고 있으면서도 소통한다는 느낌이 든 사람은 없었던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소통이라는 것이 반드시 생각이 일치해야 가능한 것은 아닌 것 같다.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으니 다양한 생각도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고, 다른 것을 틀린 것이라 단정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으니 훨씬 유연하게 많은 것을 접할 수 있었다.
나와 다르다고 배척하고, 심지어 진실까지 매도하는 오만함은 상대에게 커다란 상처를 주지만, 그보다도 한 뼘 남짓한 좁은 생각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하는 어리석음이 스스로를 해치는 더 큰 자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도 누군가에게 그 선배처럼 아무 얘기나 툭툭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지 내 생각의 그물을 한 번 챙겨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