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파란 해밀 Jul 05. 2022

첫나들이




제대 후에도 군대에 다시 가야 된다며 헌병이 잡아가는 꿈을 한동안 꾸었다는 작은 오빠의 이야기를 그저 우스갯소리로 만 여겼다. 36개월 군 생활의 무게를 전혀 몰랐기 때문이다. 백수가 된 지 일주일이 되었지만 여전히 내일은 출근해야 할 것 같고, 회사에서 호출 전화가 올 것 같다. 36년 세월의 묵은 더께가 쉽게 가시지 않는다.

입사 동기가 비번이라 영도에 있는 흰 여울 문화 마을에 함께 가기로 했다. 마침 집 근처에서 바로 가는 직행버스가 있어 20분 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조금만 마음을 내면 갈 수 있는 지척의 거리에 있는데 까맣게 모르고 살았다.









대교를 달리며 창밖으로 보이는 북항의 모습이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가슴을 후빈다. 지겹도록 봐온 붉은 컨테이너마저 일렁이는 바다 끄트머리의 소맷자락에 박힌 빨간 큐빅처럼 반짝인다. 설익은 그리움과 달라진 상황이 이토록 사람의 시선을 뒤집어 놓는다.  

도착해서 경사진 골목을 내려가니 해안을 따라 예쁜 마을 길이 이어져 있다. 노란색 벽이 소풍 나온 유치원생처럼 들뜨게 한다. 예전에는 엄두도 내지 못했을 텐데 지나는 길에 잠시 들러 만 원어치 사주도 보았다. 아무 데나 퍼질러 앉아 아무 거나 해도 좋다. 무슨 소리를 들어도 벙글거릴 것처럼 내 속에는 커다란 비누 방울 같은 것이 자꾸 차오른다.









정오를 한참 넘긴 시각까지 짙게 낀 해무가 바다를 감싸고 있더니 차츰 맨 얼굴을 내주었다. 눈이 빠져라 서류와 컴퓨터로 온종일 씨름을 하고 있을 때 영도의 바다는 이렇게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구나. 하늘 아래 같은 세상인데도 먼 피안의 것 같이 느껴진 것은 그동안 제대로 누려보지 못한 데서 오는 비뚤어진 저항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없어도 햇살은 저렇게 바다를 빛나게 하고, 파도는 또 저렇게 눈부신 빛을 뭍으로 옮겨 놓고 있었겠지......  누군가 툭 치면 옳다구나 하고 왈칵 눈물을 쏟아낼 것 같다. 내가 보지 못해도 한결같이 빛나고 있었던 저 찬란한 햇빛이 억울해서......, 그동안 옥죄고 있던 것들로부터 벗어난 이 찬란한 자유로움이 기꺼워서......


카페를 나올 때까지도 파도는 여전히 대지를 쓰다듬고 있다. 나를 쓰다듬어 주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백수의 일기를 시작하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