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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 해밀 Jul 06. 2022

백수도 경쟁




퇴사하기 오래전부터 등록할 강의를 알아보았다. 배우고 싶은 것은 많으나 저질 체력이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 일단 두 개만 신청했다. 나머지는 이번 달 베트남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 신청하기로 했다. 일주일에 5일 수업인 영어 학원의 원어민 회화 수업을 끊을까 했더니 후배가 극구 말렸다. 


"그렇게 매일 다니는 거는 힘들어서 못해요"

나도 내 체력을 잘 아는 터라 마침 일주일에 한 번 가는 영어 수업이 있어 3개월 등록을 마쳤다. 내가 좋아하는 버스를 타고 살랑살랑 왔다 갔다 하기만 하면 되는데 뭐가 그리 힘들까 싶었는데, 후배의 말을 듣기 잘했다고 생각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하루 종일 실내에 앉아서 일하는 것과는 사뭇 달랐다. 오전이나 오후에 볼 일을 보고 돌아오면 어김없이 파김치가 되었다. 





© jessicalewiscreative, 출처 Unsplash





월요일 첫 영어 수업에 참석했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어 걸어서 가는 동안 떨리기도 하고, 설레기도 했다. 한낮의 땡볕에 땀이 삐죽빼죽 새어 나와도 새 책가방을 메고 입학하는 신입생처럼 좋았다. 시간 여유를 두고 도착했는데도 교실 안에는 벌써 몇 명의 학생들이 와 있었다. 공부하러 온 학생들은 나보다 나이가 위이거나 조금 아래이거나 했다. 나이는 있어도 책상에 앉아 수업을 준비하는 모습은 다들 진지해 보였다. 

강의 접수 첫날, 시간이 되자마자 부리나케 온라인으로 등록을 마치고 잠시 후 확인해 보니 금세 정원이  다 차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다들 어디선가 아침 일찍부터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가 등록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덕분에 주말에 있는 영어 수업은 놓치고 캘리그래피 수업을 대신 신청해야 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이 공부하러 오는지 내심 궁금하기도 했다.









장인에 비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시간적인 여유가 있으니 그만큼 간절함이 덜 할 것이라 지레짐작한 것이 첫 수업을 하며 부끄럽고 미안해졌다. 세심하게 챙겨 온 학습 도구에는 묵은 성실함이 배어 있고, 꼼꼼하게 메모하고 열정적으로 수업에 참여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문득 백수의 세계도 경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직장을 다닐 때와는 달리 그다지 무겁지 않게 시작했는데 첫 수업을 마치고 마음이 바뀌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수업 시간에 나눠준 유인물을 외우기 시작했다. 하나가 들어가면 서너 개가 빠져나오는 이 대책 없는 암기력에도 불구하고, 영어 문장을 외우고 또 외우는 나를 보며 백수들의 경쟁에 긴장한 건지, 그동안 경쟁에서 살아남으려 발버둥 치던 버릇인 건지......

오늘도 나는 서툴게 내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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