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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 해밀 Aug 01. 2022

길 위의 추억




베트남에 몇 번을 왔지만 올 때마다 초반에 정신이 없는 것은 매번 똑같이 겪는 일이다. 무엇보다 도로에 한가득 부어 놓은 것 같은 오토바이가 제일 먼저 정신을 빼놓는다. 달랏에 와서도 마찬가지다. 호수 공원을 중심으로 사통팔달로 이어진 도로를 가로질러야 어디든 갈 수 있는데 오토바이 때문에 길을 건너지 못해 가는 걸 포기하거나 그랩으로 오토바이를 부르거나 해야 했다. 도무지 오토바이의 물결을 끊고 도로를 건널 자신이 없었다.

보기 드물게 시내 한가운데 신호등이 있는 곳도 있다. 그런 곳은 그나마 길을 건너기가 수월했다. 초록 불이라 마음 편히 길을 건너고 있으면 난데없이 불법 좌회전한 대형 관광버스가 내 코를 스치듯 당당하게 들어와 내쳐 달리는 것을 보며 어쩌다 한 두 군데 있는 신호조차도 지키지 않는 무질서에 화가 치밀기도 했다.








언젠가 베트남에도 번듯한 신호등이 많이 들어 서고, 사람들이 꼬박꼬박 그 신호를 잘 지키면 베트남만의 독특한 매력이 없어지는 걸까? 하는 어이없는 생각을 대책 없는 교통질서의 궁색한 위안으로 삼아보았다. 메인 도로 한 블록만 들어가도 조용하고 사람 냄새나는 길이 많은데 차로는 온통 사람 혼을 쏙 빼놓는다.

처음에는 길을 못 건너 애를 먹던 것이 지내다 보니 차츰 적응도 하고 대담해졌다. 언제 어디서나 원하는 대로 느긋하게 길을 건넌다. 달려오는 오토바이와 약간의 거리가 있으면 도로 안으로 일단 발을 내딛는다. 그러다 정 안 되겠다 싶으면 유치원생처럼 한쪽 팔을 높이 들고 가면 오토바이들이 알아서 피해 간다. 경적을 울리기도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내 갈 길을 가면 된다.








그렇게 적당히 도로를 가로질러 용감하게 다닐 즈음, 어디가 어딘지 몰라 처음에는 구글로 마트, 약국, 카페, 상점 등을 찾기에 급급해서 보이지 않던 동네가 차츰 눈에 들어왔다. 겨우 두 사람만 걸어도 어깨가 닿을 것 같은 좁은 골목 안에 백설 공주의 일곱 난쟁이나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 작은 가게에도 손님이 있는 것이 신기했다.   

10대 여학생 세 명이 나란히 앉아 밥을 먹고 있는데 나도 들어가 보고 싶었지만 막상 그러지 못했다. 내 궁둥이를 갖다 붙일 만해 보이지 않아서였다. 한 번, 두 번 지나치다 보니 좁아터진 그 작은 골목에 자꾸 정이 갔다.








어느 날 아침, 골목을 지나는데 눈앞에 살찐 쥐 한 마리가 가로질러 달려가고 있었다. 초등학교 때나 보고 못 보았으니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한국이라면 기겁을 하고 난리가 났을 텐데, 무얼 먹고 사는지 통통한 쥐의 뒤태가 그래도 먹고살 만은 한 가 보다 싶어 안심하며 빙긋 웃는 내 모습을 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냥 그 길에 동화되어가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발 디딜 틈도 없이 빼곡한 만원 버스 안에서 모두 어깨를 곧추세우고 있는 사람들처럼, 다닥다닥 붙은 좁다란 건물들이 베트남 사람처럼 아담하다. 다들 비슷한 몸집과 비슷한 높이로 키를 맞추고 서 있다. 낡은 난간, 창 틀 앞에는 갖가지 크고 작은 화분이 집주인의 갖은 정성에 초록 물을 뿜을 듯 싱싱하게 잎을 틔우고 있다.

기껏 말려 놓은 옷은 우기에 금세 다시 꿉꿉해져서 입으려고 하면 불쾌한데, 비가 왔다 갔다 하는 변덕스러운 날씨에 빨랫줄을 비웠다 채웠다 하는 동네 아주머니의 분주한 손끝이나 얼굴 어디에도 짜증은 찾아볼 수 없다. 고급 건조기 같은 것은 없이 살아도 햇빛이 쨍할 때 작은 옥상에 그들의 마음도 잠시 널어 말리며 그렇게라도 드는 햇빛에 기꺼워하며 사는지 모르겠다.








특별한 일이 없거나, 일찍 숙소에 돌아온 날은 동네 카페에 자주 들르곤 했다. 동네를 내려다볼 수 있는 3층 창가가 가장 인기 있는데 다행히 갈 때마다 자리가 비어 있어 창 밖을 보며 글을 쓰기에 그저 그만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쏟아지는 장대비를 바라보기만 해도 마냥 좋았다. 멍 때리며 비를 바라보았던 적이 언제였나 싶다.









조금 전만 해도 동네가 떠내려 갈 듯이 비가 퍼붓다가도 5분 뒤에 언제 그랬냐는 듯 말간 얼굴을 내미는 하늘은 사람을 놀리려는 게 아닌가 싶다. 3층 창가에서 바라보는 비는 폭우가 쏟아져도 옷 젖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고, 집이 가까워서 잠깐 비가 멈추면 쪼르르 달려갈 수 있으니 아무 걱정 없이 감상할 수 있어 좋다. 길은 언제나 똑같은 그대로인 듯 한데 내게 한 번도 같지 않은 다른 기억을 추억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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