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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 해밀 Aug 05. 2022

꿈꾸는 백수......




이번 베트남 여행은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정해진 곳은 아니다. 언젠가 꼭 가겠다고 중학생 때 내게 약속했던 페루의 마추픽추, TV에서 보고 꼭 걸어 보고 싶었던 조지아의 카즈베기, 간절히 보고 싶었던 칠레 이스트 섬...... 언제나 선택한 장소의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나트랑과 달랏은 아무 이유 없이 제일 먼저 나갈 수 있다는 것으로 찍었으니 그것도 굳이 이유라면 이유일 것이다. 퇴직을 하고 가장 먼저 출발할 수 있는 항공편이 이곳이었다. 특별한 이유가 없었으니 특별히 준비하거나 계획도 없이 떠났다. 대략 묵을 일정과 장소만 정하고 무엇을 할지, 어디를 갈지...... 등 구체적인 생각도 하지 않았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 









의욕이 없다고 해야 할지, 대책이 없다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어쩌면 애쓰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 맞는 표현이 아닐까 싶다. 그게 가장 근접한 답인 것 같다. 열심히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빈틈없이 사각 궤를 꾀어 맞추듯 살아온 지난 36년에 반항하고 싶었던 걸까? 그 짓을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흔히 하던 현지 투어도, 유명 관광지도 가려고 하지 않았다. 컨디션이 좋지 않거나, 나가기 싫은 날은 카페나 숙소에 내내 머물렀다. 









간절히 바랐던 백수였고, 나름 백수에 자신이 있었음에도 막상 닥친 현실은 혼란스러웠다. 술이 가득 담긴 술잔 같았다. 찰랑찰랑 언제 쏟아질지 모르는 흔들리는 술잔이었다. 흔들리고 싶지 않은데 자꾸 흔들려서 얼른 잡지 않으면 왈칵 마음이 쏟아질 것 같았다. 그래서 낯선 곳에서 긴장하는 것으로 나를 곧추세우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처음 가 본 곳에서 나는 길을 찾기 위해 눈에 힘을 주며 돌아다녔고, 때로는 제대로 찾지 못해 이리저리 헤매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일렁이는 나를 잠시 잊기도 하고, 일렁이는 것을 잠시 잊기도 했다. 한꺼번에 쑥 다 빠져나간 것 같은 허전함도 잊을 수 있었다. 









사진을 정리하다 보니 이번 여행에서 나를 찍은 것이 공교롭게도 발을 찍은 사진 네 장이 전부이다. 셀카봉도 가져가지 않았고, 굳이 다른 사람에게 찍어 달라고도 하지 않았다.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느꼈으니 아쉬울 일은 아니지만 예전처럼 적극적으로 낯선 이에게 다가가던 열의도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 의미도 부여하지 않은 채 나 자신을 투명하게 내버려 두고 싶었다. 그냥 볕에 내어 말리고 싶었다. 

그동안 하기 싫어도 해야 할 일도 많았고, 의미 없는 일도 있었다. 상하 조직에 맞추고, 분위기에 적응하며 억지로 해야 할 때도 있었다. 이제는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데 날짜에 맞춰 내는 과제물 같은 여행을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후 일렁이던 마음은 많이 가라앉았다. 이젠 백수의 생활에 제대로 젖어볼까 한다. 계속 공부하고 싶었던 가을학기 어반 스케치 수업 등록을 해놓고, 언젠가 작은 스케치북 하나 꿰어 차고 다시 먼 길을 떠나는 백수의 제대로 된 여행을 꿈꾸며 한 발, 한 발 내디뎌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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