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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 해밀 Sep 20. 2022





백수가 되고 나서 꼭 해보고 싶은 것 중의 하나가 아침 등산이다. 등산이라고까지 하기에는 남부끄러운 수준이지만 어쨌든 남들 출근하는 시간에 보란 듯이 산에 가보고 싶었다. 언젠가 신호등에 걸려 출근하는 차에 앉았는데 가을 단풍보다 더 새빨간 점퍼를 입고 등산길에 나서는 서너 명의 등산객을 보고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등산화 뒤축에 달라붙은 느긋한 여유가 탐났던 것이다. 

퇴직하고 간간이 산에도 가 봐야지 했는데 3개월이 다 가도록 그러지 못했다. 예전부터 괴롭히던 피곤이 여전해서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러던 것이 기 수련을 두어 달 하고 나서부터는 차츰 컨디션이 좋아져서 산에 가 볼 결심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예전에 갔던 곳이 아닌 다른 곳을 가보기로 했다. 무리하지 않고 왕복 2시간 정도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옷장 속에 깊숙이 넣어둔 등산바지를 오랜만에 꺼내 입었다. 퇴직 후 체중이 많이 줄어 벨트를 하고도 엉덩이에 겨우 바지가 걸린다. 남의 옷 빌려 입은 것처럼 핫바지 같은 등산복을 입고 길을 나섰다. 





© ignaz_wrobel, 출처 Unsplash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길을 나섰다. 막연히 산이 있는 방향으로 걸었다. 가다가 정 모르면 물어보면 되지...., 가다 보면 산이 나오겠지...... 하는 생각으로 걸었다. 집에서 나와 20분 정도 걸었을까? 산으로 오르는 좁다란 길이 보였다. 사람들이 많이 다녔는지 좁지만 길이라고 또렷이 구분이 나 있었다.

그곳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조금 가파르게 오르다가, 지그재그로 오르다가 그냥 길이 나 있는 대로 발을 옮겼다. 이대로 계속 따라 오르면 될까? 하는 의심이 들 즈음 제법 큰 등산로가 나왔다. 오르는 방향으로 다시 걸었다. 한참을 오르도록 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주말이라면 당연히 북적거렸겠지만 평일이다 보니 인적이 드물 것이라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괜히 왔나? 하는 후회가 살짝 들었다. 그래도 낮이니까 괜찮을 거야 하는 위안도 했다. 내가 여기 온 것을 아무도 모르는데 누군가에게 전화를 해서 알려 두어야 하나? 하는 촌스러운 생각이 들 즈음, 더 넓은 등산로가 펼쳐졌다. 다행히 그곳에는 오르내리는 등산객이 제법 있었다. 제대로 된 길을 찾은 것 같았다. 






© jordanladikos, 출처 Unsplash






마음이 놓여서 일까? 그제야 시원한 바람이 느껴졌다. 오르는 사람들을 따라 걸었다. 어디로 향하는 길인지는 몰라도 반듯하게 나 있는 등산로를 따라 걷다가 어느 정도 시간에 맞추어 반환점을 돌아 내려오면 되니 아까 보다 훨씬 홀가분해졌다. 1시간가량 되었을 즈음, 그곳에서 서너 군데로 갈라지는 길이 나왔다. 이번에는 이쯤에서 돌아가기로 했다. 

내려오면서 느긋하게 주변을 둘러보니 이리저리 보이는 것이 온통 길이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모르고 올랐지만, 결국엔 모든 길이 정상으로 향하고, 시작한 곳으로 이어진다. 비록 선택에 따라 그 과정은 다르지만 길은 여러 갈래로 나뉘기도 하고, 또다시 만나기도 한다. 

힘들게 올라야 하는 눈 위의 길, 눈 아래의 경사진 길, 옆으로 편편하게 난 길, 그 많은 길 중에 내가 선택한 길은 어느 길이며, 나는 지금 어떤 길에서 어디쯤 가고 있을까? 하는 물음이 진동을 울린다. 내려가는 길도 여러 갈래다. 올라올 때와는 다른 길로 접어들었다. 

태산이라는 인생에서 나는 극히 낮고 작은 언덕을 겨우 오르면서 어쩌면 부질없는 걱정을 하며 산 것은 아니었을까? 궁극적으로 그 길은 모두 시작과 끝이라는 내 손에 잡히지 않는 생각 저 너머 하나로 귀결되는 것인데 말이다. 늦었지만 머릿속에 이리저리 뻗어 있는 잔뿌리 같은 길을 지우개로 벅벅 지워볼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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