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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 해밀 Nov 25. 2022

어반에 빠지고, 어깨도 빠지고




오랜만에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동안 어반 스케치에 빠져 사느라 한동안 글 쓰는 것을 미루었다. 퇴직 전부터 배워 보고 싶었던 것이라 가을학기가 시작하자마자 문화센터에 등록을 했다. 유화를 10년 넘게 그렸지만 재료와 기법이 다르니 초반에는 감을 잡기가 상당히  어려웠다. 마음과 눈은 뻔한데 좀처럼 따라주지 않는 둔한 손이 원망스러웠다. 







이게 아닌데? 하면서 하루를 그리고, 왜 안되지? 하면서 이틀을 그려 나갔다. 언제나 완성된 그림은 내가 생각하는 의도와는 다른 선과 색으로 내 속을 뒤집어 놓았다. 세상에 아무리 내 맘대로 쉽게 되는 게 없다지만 손바닥만 한 종이의 그림 한 장도 선뜻 내 뜻대로 그려지지 않는 것이 괜스레 약이 올랐다. 








그러자 또 못 된 성질머리가 올라왔다. 오기를 참지 못하고 하루 종일 앉아서 그림만 그리기 시작했다. 꼭 나가야 할 일이 아니면 집에 처박혀서 낮이고, 밤이고, 새벽까지 잠도 안 자고 주야장천 그렸다. 아침에는 떡 실신이 되어 나가떨어졌지만 탐탁지 않은 그림 때문에 눈만 더 말똥말똥 해졌다.









게다가  껌딱지처럼 따라다니며 방해하는 놈도 있었다. 고양이 녀석은 툭하면 테이블로 올라와 드러눕기 일쑤다. 제 궁둥이 커진 줄은 까맣게 모른 채 빈자리도 없이 빼곡한 테이블 틈을 비집고 들어와 철퍼덕 엎어져 내쳐 자기 일쑤다. 









아무 생각 없이 팔레트를 밟고는 물감 도장을 찍어 나르기도 하고, 잠시 고개만 돌리면 붓을 씻은 물통의 물을 찍어 먹거나 붓을 건들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단 하루도 녀석은 내가 편하게 그림을 그리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그렇게 녀석을 어르고 달래 가며 3개월째 접어들었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조금씩 색감이 읽혔다. 내가 바라는 선도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뭔가 그림에 대한 방향이 보이기 시작할 즈음, 어깨가 아프기 시작했다. 수영할 때 자세가 잘못되어 그런가 싶어 수영을 3주가량 쉬었지만, 증상은 더 할 뿐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한방, 양방 온갖 병원을 다 다녀보았지만 쉽게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팔을 살짝만 들어 올려도 어깨가 아프고, 자다가 방향만 틀어도 통증이 왔다. 언제나 그렇듯이 딱히 이유도 모른 채 당하는 고통이 참 대책이 없다.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했다. 









그러다 문득, 내가 너무 하루 종일 그림만 그려서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미쳤다. 좌식 이젤 앞에서 그림을 그리다 보니 계속 오른쪽 팔을 들고 그림을 그려야 했다.  그것도 하루 종일 틈만 나면 그려댔으니 종일 올라간 어깨가 불편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 그리는 동작을 취하며 어깨를 만져보니 역시 회전근 쪽에 많은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 상태로  몇 날 며칠을 그러고 있었으니 어깨가 어찌 탈이 나지 않았을까 싶었다.









어느새 나는 또, 나도 모르는 사이 30여 년 몸에 밴 습관대로 살고 있었다. 천성인지, 습관인지 내 속에 가라앉아 있던 앙금이 한꺼번에 소용돌이친 것 같다. 백수가 되면 느린 걸음으로 살아보려 했던 마음은 온데간데없고, 시작했으니 잘해야 한다는 욕심에 나는 기어이 어깨 한쪽을 내어주어야 했다. 









그래서 하루에 한 장만 그리기로 했다. 거실에 펴져 있는 테이블을 볼 때마다 이젤 앞에 앉고 싶지만 느리게 느리게 그리기로 했다. 하루 동안 그림을 쉬었더니 어깨가 한결 편해졌다. 주사를 맞고 약을 먹어도 쉽게 잡히지 않던 통증이 그림을 멈추니 훨씬 누그러졌다. 느리게 가야 할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오랜 기간 속세(?)에서 물든 삶의 전투가 늙은 백수의 어깨에 고스란히 물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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