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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 해밀 Feb 09. 2023

백수의 입맛





오래전에 도망간 입맛은 여전히 돌아올 기미가 없다. 퇴직하기 전부터 식욕이 떨어져 꼬박꼬박 돌아오는 점심시간이 참으로 곤혹스러웠다. 수영 때문에 저녁으로 삶은 계란과 과일 몇 조각을 먹었지만 수영만 아니었으면 그조차도 건너뛰었을 텐데 그때나 지금이나 수영이 내게는 가장 큰 먹을 이유이다.

백수가 되고 나서 어김없이 찾아오던 점심시간이 없어졌다. 구내식당 짬밥이 사라지고 보니 겨우 챙겨 먹던 점심까지 소홀해진다. 입맛이 없으니 안 먹게 되고, 먹기 싫으니 반찬을 하지 않게 되고, 먹을 찬이 없으니 배가 고파도 더욱 먹지 않게 된다.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식당을 가 봐도, 별을 수두룩하게 받은 맛집에서 배달을 시켜봐도 이도 저도 영 구미가 당기지 않는다.






© petradr, 출처 Unsplash





그래서인지 백수가 된 지 두 달이 접어들 무렵 체중이 4kg이 줄었다. 특별히 다이어트를 한 것도 아닌데 백수의 꿈(?)을 이루면서 치러야 할 값이었던 것 같다. 세상에 공짜 없다더니, 용왕님께 조르면 안 될 것도 없을 것 같은 인어 공주도 다리를 얻는 대신 목소리를 내어주었던 것처럼, 나는 편안한 백수가 되는 대신 입맛을 내어주어야 했다.

음식은 내게 살기 위해 필요한 수단이었다. 그래서 여행을 가거나 평소에 특별히 맛집을 찾아 나서거나, 유명한 식당에서 한두 시간씩 줄을 서서 기다리는 열성은 전혀 없다. 배만 고프지 않으면 됐고, 허기만 면하면 족했다. 그래서 기억에 남는 맛집도 딱히 없다.






© aaronburden, 출처 Unsplash





그런데 가끔 북적거리던 구내식당이 그리울 때가 있다. 삼삼오오 짝을 지어 들어서면 코앞까지 마중을 나오던 구수한 밥 냄새, 은회색 식기의 반짝거리는 환대가 떠오르곤 한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백수가 되어 구내식당 식판을 그리워할 줄은......

아마도 오랫동안 몸에 배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너무 익숙해서 당연하게 여겼던 것이 그로부터 막상 벗어나고 나서야 그것을 진하게 그리워하는 백수는 오늘도 커피 한 잔으로 점심을 때운다. 그런 내게 백수의 식판 같은 것은 또 무엇인지......  뒤늦은 그리움을 후회하지 않게 주섬주섬 챙겨 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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